배양액 교체... 온실 온도 조정... 성장 상황 기록...
일정표에 있는 항목들을 차례대로 체크해 보니, 오늘 아침의 작업은 거의 마무리된 것 같았다.
단말기 패널을 접은 뒤, 온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 자동문이 열렸다.
여기 계셨네요.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님.
온실 담당자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까지 서둘러 달려온 것 같았다.
일에 방해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어머, 이 꽃은 아직도 피지 않았네요? 나무에서 배양기로 옮겨 심으면 꽃이 잘 피지 않더라고요. 아무래도 환경 파라미터를 조정해야 할 것 같아요. 하하하...
지휘관을 힐끗 본 그녀는 긴장을 풀려고 하는 듯, 하얀 꽃봉오리로 시선을 돌리고 주절주절 말했다.
줄곧 공중 정원에 있었던 데다 집행 부대와는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담당자는 며칠 동안 함께 일했는데도 불구하고,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서먹서먹했다.
아... 그렇군요... 하하하...
사실은 그러니까... 그게... 추가 업무를 부탁드려야 할 거 같은데요.
말을 더듬는 온실 담당자의 모습은 엄청난 갈등에 빠진 거 같았다.
음, 아니에요. 자꾸 지휘관님께 신세를 지면 안 되죠.
제가 요 이틀 동안 자리를 잠시 비울 예정이라, 혹시 물어볼 게 있으시면 다른 담당자한테 물어보시면 됩니다.
오랜 고민 끝에 온실 담당자는 모든 걸 포기하고 받아들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네. 지휘관님도 정화 구역 건설 계획에 대해 들어보셨죠?
지상 온실도 계획의 일부이면서 상당히 중요한 전략 계획이니, 무시하시면 안 돼요.
인력 부족은 고질적인 문제죠. 자동화 프로그램의 조정이 끝나기 전까지는 다른 곳에서 인원을 데리고 와야 해요.
세리카는 지휘관에게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죠?"라는 눈빛을 보냈다.
게다가 온실 담당자는 한 번도 지상에 내려가 본 적이 없는 데다, 부대 인원과 접촉한 적도 없어서 낯까지 가려요.
그래서 협력하는 인원이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상대방의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는 셈 친다고 생각하세요. 부탁드릴게요.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님.
출발하기 전에 세리카가 했던 당부를 떠올리며, 온실 담당자를 불렀다.
네?
죄송해요. 그동안 집행 부대 사람들을 모두 인정머리 없는 냉혈한 전사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제가 부탁한 일도 내키지 않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온실 담당자는 갑자기 목이 잠긴 소리로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절 도와주실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동료들이 다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그 얘긴 그만하시고, 가면서 업무에 대해 알려드릴게요.
지휘관은 공사 중인 시설을 지났고, 담당자와 함께 사무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네. 아시다시피 현재 인원으로는 겨우 온실만 유지할 수 있잖아요.
토양 샘플링, 식물 채집, 생태 기록과 같은 외근 임무를 할 수 있는 인원이 없어요.
그래서 임시로 온실 유지에 증원을 신청해서 외근 임무에 나갈 인원을 확보할 생각이었습니다.
온실의 자동 프로그램이 완성되고 나면, 귀중한 샘플들도 바로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제출한 신청서가 심사도 통과해서 인력이 배정되기는 했지만…
말을 마친 담당자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무언가에 겁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협력 인원으로 온 분이 피에 주린 이루 말할 수 없이 잔혹한 케르베로스 대원이래요.
케르베로스가 과한 행동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이런 소문은 사실과 너무 동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당자에게 설명하려는 그때, 담당자가 갑자기 흥분한 어투로 말했다.
그들은 심기가 조금이라도 뒤틀리면, 다른 이의 목에 칼을 겨눈다면서요?
초과 용량으로 만든 시한폭탄을 설치한 뒤, 도망칠 시간도 주지 않는다면서요?
어릴 때부터 살육 병기로 키워진 하얀 야수가 있는데, 귀신처럼 섬뜩하게 웃는다면서요?
문득 담당자가 들은 소문이 어떻게 보면 현실과 별반 차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들과 함께 행동한다는 걸 상상만 해도 정말 끔찍해요. 전 퇴직하면 공공 교육 센터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고요!
그래서 같은 집행 부대인 지휘관님께 부탁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그 행동이 지휘관님께 되레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걱정됐었거든요.
같은 집행 부대라고 해도 그들이 두려운 건 마찬가지라고 들었는데요...
사무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담당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제가 이 문을 여는 순간 무르지 못해요. 그러니 지금 포기해도 늦지 않아요. 그럼, 셋을 셀게요.
3……
케르베로스의 대원들과 아는 사이라고 말하려던 순간, 눈앞의 문이 안쪽에서 벌컥 열렸다.
으악! 살려주세요!
담당자는 갑자기 열린 철문을 보며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지만, 결국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이때, 지휘관을 지나친 작은 체형의 실루엣이 넘어지는 담당자를 뒤에서 받쳐줬다.
감사합니다.
등 뒤의 지탱해 주는 힘을 느끼며, 담당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담당자의 눈에 다소 창백한 얼굴과 부서진 눈꽃이 들어 있는 것 같은 의안이 보였다.
담당자가 구조 요청을 했어.
적이 나타난 거야? 근데 21호는 아무도 못 봤는데?
21호는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주위에 존재하지도 않는 적을 찾아다녔다.
담당자는 자기 목에 송곳니가 가까이 있는 것을 보면서, 눈물 가득한 눈으로 지휘관을 보며 도움을 청했다.
살려... 살려주세요.
?
지휘관은 다리에 힘이 풀려서 21호에게 기댄 담당자를 일으켜줬다. 그러자 온실 담당자는 재빨리 지휘관 뒤로 숨었다.
음...
21호는 지휘관의 말을 들은 뒤, 자신만의 방법으로 주위의 안전을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경계 해제.
21호는 지휘관 뒤에 숨은 담당자를 바라봤다. 그러자 시선을 느낀 담당자는 당황한 듯 몸을 더욱 움츠렸다.
21호. 사과할게.
익숙한 냄새를 맡았는데, 다른 사람과 같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어.
다음부터는 21호가 조심할게.
전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그냥 투명 인간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낯가림이 심한" 담당자는 방금 전의 근접 접촉에 꽤 놀란 모습이었다.
알겠어. 투명 인간.
절 그렇게 부르라는 말은 아니라...
온실 담당자가 지휘관 뒤에서 조용히 반박했다.
대장이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라고 했거든. 그래서 21호는 이곳으로 왔어.
어... 혹시... 두 분 친한 사이인가요? 그럼, 방금 제가 했던 각오는 다 헛수고였네요?
이 배신당한 듯한 말투는 뭐지?
엄청 친해.
지휘관과 21호는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똑같은 대답을 들은 지휘관이 21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검은색으로 바뀐 순백색 코팅, 세운 귀 그리고 긴 꼬리는 21호가 원래의 모습과 다르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 지금의 21호는 더 이상 백지장이 아니었다.
엄청 친해.
지휘관과 21호는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지휘관의 대답을 들은 21호는 자신의 송곳니를 드러냈다.
당황한 지휘관이 이유를 설명했다.
[player name]의 냄새는 변하지 않았어. 21호는 계속 기억하고 있어.
21호는 더 강해졌어. 하지만 [player name]은(는) 계속 제자리에 있는 거 같아.
기분 탓인지 21호의 말투에서 살짝 자부심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21호는 [player name]을(를) 잘 알아. 그러니까 [player name]도 21호를 알아야 해.
임무, 같이 하자.
따뜻한 햇살 아래, 지휘관은 어린 늑대의 초대를 받았다.
지휘관은 그 순간이 되고 나서야, 21호의 변화가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건 예전엔 볼 수 없었던 적극적인 행동이었다.
저기...
뒤에서 담당자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두 분께 가장 알아야 할 것은 임무의 세부 사항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