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됐어.
반즈가 연구원의 치료를 마칠 무렵, 붉은 석양도 서서히 저물어갔다. 이렇게 올해의 우화절 축제는 뜻깊은 마무리를 맺었다.
비록 지휘관은 기둥에서 떨어지고 말았지만, 모두가 입을 모아 우화절 역사상 가장 빠른 "기록"을 세웠다고 인정했다.
우승 경품이었던 황주 항아리들과 사탕 보따리들이 진료소로 전달되었다.
완이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었다. 황주는 진료소에 보관되어, 방안에 진한 술 향기를 풍겼다.
술 향에 이끌린 연구원들이 하나둘 진료소를 찾아왔다. 진료소의 의료진들은 술을 즐기지 않았기에, 마을 주민들과 연구원들을 초대했다.
이것이 사람들이 만취한 이유였다.
반즈는 돌아오자마자 취한 사람들 사이를 지나, 어제 가져온 약초를 화로에서 달이기 시작했다.
안심해, 이건 네게 아니야.
축제에서 술에 취한 몇 명이 충고도 듣지 않고 숲에서 버섯을 따왔더라고.
우화절이 끝나면 우린 공중 정원으로 돌아가야 해.
머문 시간이 길진 않았지만, 여기서 정말 편하게 지냈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거야.
나중에 다시 올 수 있으면 좋겠네.
문밖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발걸음 소리에 둘은 순간 말을 멈췄다.
이제야 생각났네. 반즈 선생! 지휘관!
우화절이었어! 그걸 이제야 떠올리다니.
중경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완이의 부축을 받아 방으로 들어왔다. 그의 떨리는 손에는 낡은 책자가 들려있었다.
그래서 전부터 낯이 익었던 것이야. 진작 알아차려야 했는데 이제야 생각나는구먼.
중경이 격정에 찬 눈으로 반즈를 바라보았다. 나이 든 그의 몸은 감정의 동요를 이기지 못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부모가 구룡 사람이지 않나?
왜 갑자기 그 얘기를...
자네 모친의 이름이 뭔가! 혹시 반서라고 아는가?
……
반즈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이 이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퍼니싱이 폭발하기 전이었네. 그때도 우화절 즈음이었고, 자네들처럼 구룡의 과학 연구원 몇 명이 산에서 길을 잃었다가, 내 딸이 진료소로 데려왔다네.
그 과학 연구원들은 남온에 많은 기계 보조기를 만들어주고 진료소도 보수해 주었지. 운 좋게 퍼니싱에 침식되지 않은 것들도 있어, 지금까지도 사용하고 있다네.
과학 연구원 중에는 구룡성의 의사도 있었네. 그 의사는 의술이 정말 뛰어나 우리에게 많은 자료를 남겨주었지.
그 말은...
그들이 바로 반즈 선생의 부모네.
인간 같은 기계체들을 만들다니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쪽 기술에 조금 관심이 있을 뿐이에요. 엄청난 선진 기술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쓸 만하죠.
진료소도 수리해 주셨는데, 마을 주민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서, 앞으로 이런 선진 기술을 쓸 일이 없을 것 같아요. 이제는 저와 딸아이뿐이고, 진료소도 오래 유지하지는 못할 것 같네요.
아니요. 남온은 좋은 곳이니, 떠난 이들도 이곳을 잊지 않을 거예요. 사람이 있는 한 진료소는 필요한 법이고, 기계체의 도움도 필요할 거예요.
평소 치료에 사용하는 약재들은 뒷산에서 채취하는 거죠? 일행 중에 약초에 관심이 있는 분이 이곳의 약초들은 외부에서 보기 힘든 품종이라 하더라고요. 이걸로 한번 연구해 보면 어떨까요.
옛말에 "낙엽은 뿌리로 돌아간다"라고 하잖아요. 떠난 이들도 결국 남온으로 돌아올 것이고, 마을도 다시 활기를 되찾을 날이 올 거예요.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겠네요.
깔끔하고 차가운 인상의 여성이 드물게 미소를 지었다.
십 년, 아니 오십 년이 지나 제가 다시 이 마을을 찾을 때도, 여러분들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으면 좋겠네요.
반서가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아이가 자라난 모습을 보고 싶어 하죠. 이 마을의 미래도 보고 싶어요.
모든 것이 대대로 이어질 거예요.
그해의 우화절을 도와준 후로, 반서는 다시 이곳을 찾지 않았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퍼니싱이 폭발했어. 남온은 워낙 외진 곳이라 상황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네.
나는 딸아이와 몇몇 기계체들을 이끌고 마을 주민들과 함께 뒷산으로 피난했었지. 우리는 한참 뒤에야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네.
피난 생활 중 나는 딸아이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냈어. 그렇게 퍼니싱에 침식된 완이만 남게 되었고, 완이의 수술도 내가 직접 할 수밖에 없었네.
그 말을 들은 반즈도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중경은 예상과 달리 깊은 슬픔이 드러나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이 떠났고, 풍경도 훼손되었지만...
지금 자네들이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이 지나갔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네.
우화절도 예전 그대로일세.
중경이 반즈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 수첩을 가져가게.
반즈는 낡은 수첩을 받아 들고 살며시 펼쳐보았다. 반듯하고 무게감 있는 글씨체가 마침내 긴 시간을 지나 그에게 전해졌다.
그 수첩에는 많은 내용들이 적혀있었다. 반서 그리고 다른 연구원들의 일지, 남온에 도착한 후의 병례 기록, 심지어 귀퉁이에는 일상적인 이야기들도 적혀있었다.
그곳에 있던 모두에게 친숙한 이름이 한 페이지의 귀퉁이에 적혀있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반즈"라고 지어줘야겠어요.
반즈?
모든 연구원의 손이 일제히 멈추었고, 그들의 시선은 책상 앞의 여성에게 고정되었다. 기름 묻은 부품이 복도를 따라 소리를 내며 굴러갔으나, 누구도 그 소리에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
네. 아이 아빠의 고향에서 쓰는 말을 따왔는데, "세상 만물" 혹은 "만사형통"라는 의미에요.
좋은 이름이네요.
그렇죠?
제 소원이 너무 욕심인 걸까요?
책상에는 중경의 딸이 엎드려있었고, 반서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욕심이 생기는 건 당연한 거겠죠? 인간이란 종족, 특히 어머니는 원래 욕심이 많은 법이니까요.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자신의 아이에게 주고 싶어 하잖아요.
그 애가 자라나는 걸 보고 싶어요. 어떤 일들을 겪게 될지, 어떤 선택들을 하게 될지...
반서는 눈을 감고 "반즈"가 컸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는 듯했다.
그 아이가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든, 얼마나 많은 갈림길을 만나게 되든...
결국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만사가 뜻대로 되며, 모든 일이 순조로웠으면 좋겠어요.
지휘관 일행이 남온고성을 떠나던 그날, 하늘의 눈부신 태양 때문에 그들은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이마에 구슬 같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우화절이 지나면 삼복더위가 온다."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태양이 우리가 처음 왔을 때보다 훨씬 뜨겁네.
저 나무 그늘에서 잠깐 눈 좀 붙일까.
하암, 알았어.
반즈는 쏟아지는 졸음을 이겨내려 눈가를 매만지며,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러고는 허리를 곧추세워 발걸음을 재촉했다.
과학 연구원들의 노트를 전해 받은 그날 이후, 직접 얘기하진 않았지만, 반즈는 누가 봐도 마음이 착잡해 보였다.
응?
지휘관의 부름에 반즈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거...
네가 뭘 물어보고 싶은지 알아. 하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서로를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약속했잖아. 이젠 원하는 걸 확실히 알게 됐으니, 더이상 주저하지 않을 거야.
말이 끝나고 반즈가 멈춰 섰다.
전에 이런 말도 했었잖아.
인간의 운명을 위한 전쟁은 관심 없어. 단지 몇 안 되는 소중한 이들을 치료하고 싶을 뿐이야.
이제는 "소중한 이들"의 범위가 꽤 넓어졌어.
카무이, 카무, 크롬, 그레이 레이븐 소대, 남온의 사람들, 소중한 인연들이 차곡차곡 쌓여갔지. 내가 구한 생명들은 이제 네가 상상도 못 할 만큼 많아졌어.
이 많은 생명의 무게를 내가 정말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도 했었지.
하지만 이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너희가 보여준 모든 것들이 내 안의 망설임을 잊게 해줬거든.
지휘관은 반즈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 뭔데?
지휘관이 말을 덧붙였다.
반즈는 침묵 속에서 그의 말을 새기고 있었다. 숲 사이로 불어온 바람이 거세게 나뭇잎을 흔들어댔지만, 지휘관의 진심 어린 목소리만은 명확하게 들려왔다.
지휘관의 말이 끝나자, 반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응, 알겠어.
마찬가지로 너도 계속 잘 해왔어.
반즈가 지면 위로 드러난 나무뿌리를 밟으며, 지휘관을 향해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가자. 계속 앞으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