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나가 난초를 품에 안은 채 창가에 앉았다.
루나는 말없이 품에 안은 난초를 바라보며,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언제 눈치챘어?
그랬구나.
네게는 여기가 어떤 미래라고 할 수 있겠네.
모든 건 우연한 사고로 시작됐어. 과거의 내가 승격 네트워크에 침입해서 연산하고 있었고, 현재의 나는 어떤 시도를 하고 있었지.
그 결과로 네 의식이 내 앞에 오게 된 거야. 그리고 네가 계속 의식을 잃게 된 것도 이 연결이 불안정했기 때문이야.
나도 이곳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들이 진짜라고 확신하기 어려워.
그리고 네가 이곳에 오게 된 건, 아마도 우리가 의식을 연결했을 때부터 우리의 운명이 얽혔기 때문일 거야. 그래서 내가 승격 네트워크를 통해 과거의 나와 연결했을 때, 이곳으로 따라오게 된 거겠지.
적어도, <color=#ff4e4eff>내</color>가 보기엔 그래.
내 기억으로는 그런데... 기억이란 게 과연 믿을 만한 것일까?
전투를 거듭하다 보니 이 별에 나 혼자만 남게 됐어. 그리고 지금 네가 시간을 뛰어넘어 여기로 넘어왔잖아. 이런 전개가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이 이야기를 작가가 썼다면, 그 작가는 분명 형편없는 실력에 악취미를 가진 사람일 거야.
루나가 살짝 손을 흔들자 붉은 안개가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주위를 감쌌다. 그러자 지우개처럼 하얀색이 지워지고 붉은 기체가 드러났다. 이는 마치 눈앞의 그녀조차 허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했다.
루나는 다시 품 안의 난초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와 함께 난초를 보고 싶다는 소망조차, 진짜 내 것인지 확신할 수 없어.
하지만 다시 널 만날 수 있어서 기뻐.
짧은 기적일지라도, 기억의 감옥에 갇힌 소녀는 그것을 기뻐했다.
기억나? 예전에 나와 언니가 어떻게 설광의 난초 묘목을 발견했는지 말해준 적이 있잖아.
그 난초도 오래 키웠었는데, 결국엔 죽고 말았어.
네가 준 거 였어.
루나의 얼굴에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가 그렇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나중에 네가 난초 한 송이를 또 줬어. 그래서 지금 정원에 저렇게 많은 난초가 있는 거야.
맞아. 네 덕분에 사라질 뻔했던 설광의 난초를 지킬 수 있었어.
네 미래에서 우리는 정말 많은 일을 겪게 될 거야. 기쁜 일, 씁쓸한 일, 분노할 일...
정말... 많은 일을...
하지만 그건 네 미래야. 내게는 그저 하나하나의 추억일 뿐이지.
루나 인생의 모든 찬란함은 이제 고독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예전에 말했었지. 네가 원한다면 난 언제나 네 곁에 있을 수 있다고.
난 정말 그렇게 했어.
난 네 곁에 있었던 걸 후회하지 않아.
백발의 소녀가 자신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죽음만이 가득하고, 미래가 없는 세계가 되어버렸어.
너마저... 떠나버리게 되면서, 난 이 꽃 한 송이만 가져올 수 있었어.
루나는 무덤 앞에서 가져온 꽃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역시 너답네.
루나가 며칠간의 이 짧은 만남을 떠올렸다. 꿈처럼 아련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한 번의 기적을 받았으니, 더 이상을 바랄 수는 없었다.
난 너를 믿어.
어지러움이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지휘관과 루나는 이별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기적은 결국 짧은 것이었다.
빛이 서서히 시야를 뒤덮었고, 커튼과 발코니 그리고 백발의 소녀 윤곽이 하얀빛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그리고 목소리마저 조금씩 아득해져 갔다.
눈물을 흘리며 미소 띤 루나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지휘관은 루나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그 손은 루나에게 닿지 못했다.
의식을 잃기 직전, 루나가 처음에 자신에게 했던 말의 의미를 문득 깨닫게 되었다.
안녕.
……
기적이 사라지고 과거의 그림자가 원래 있던 시간으로 돌아갔을 때, 시간의 틈새에 존재하는 소녀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한 장의 "합성 사진"뿐이었다.
소녀의 몸에선 붉은빛과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빛들이 그녀의 곁에서 이중합의 사람 형태로 융합되어, 또 다른 루나, 진짜 루나가 되었다.
그것을 마친 그녀는 비틀거리며 침대 가장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여기가... 정말 미래일까?
이 며칠 동안, 루나는 투영된 자신을 통해 그녀가 보는 것을 보고, 듣는 것을 듣고, 만지는 것을 만졌다. 심지어 어떤 순간에는 자신이 직접 그 모습을 조종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앞서 했던 말들이 "미래"의 루나가 한 말인지, 아니면 자신이 한 말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여기가 정말 어떤 미래일 수도 있고, 내가 네 의식 조각일 수도 있어. 어쩌면 승격 네트워크가 널 속이려고 만든 시뮬레이션 환경일 수도 있고, 아니면 네가 가진 어떤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구체화한 것일 수도 있어.
누가 알겠어. 그건 중요하지 않아.
난 내가 꿈을 꾸는 나비인지 아닌지 신경 쓰지 않아.
그리고 너희에게는 이곳이 물속의 달처럼 보일지도 모르지.
난 그 사람과의 결말이 이렇게 될 거라는 생각하지 않아.
이 말을 들은 "미래" 루나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그래. 당연하지.
힘을 빌려줘서 고마워.
그것을 가져가.
그녀는 발코니에 있는 설광의 난초를 가리켰다.
안녕, 루나/나.
두 개의 그림자가 다시 하나로 융합되더니, 세계는 고요 속으로 잠겼다.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심전도 모니터의 비프음이 들렸고, 공기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했다. 틀림없이 생명의 별의 병실인 것 같았다.
꿈을 꾼 것 같았지만, 그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인공 천막에서 만들어낸 인공 빛이 창문을 통해 병상을 비추고 있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과 순환 시스템이 공중 정원을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온도와 습도로 유지해 주고 있었다.
틴들 현상으로 생긴 빛줄기를 바라보니, 왜인지 모를 비현실감이 피어올랐다.
이곳의 모든 것이 진실일까 아니면 거짓일까?
물에 비친 달도 똑같이 아름답잖아?
지휘관은 어렴풋이 백발의 소녀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띠띠...
단말기의 통신음이 회상하는 것을 막았다. 발신인이 알 수 없는 코드로 표시되어 있었다.
반드시 받아야 할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밀려왔다.
……
단말기에서 급한 듯한 숨소리만 들려왔지만, 상대방은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신호가 불안정한 듯했고 음성이 살짝 왜곡되긴 했다. 하지만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순간...
모래바람, 황야, 놀이공원, 푸르스름한 사진, 만개한 난초, 창가의 소녀...
수많은 장면들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어.
상대방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그 한마디에 담긴 미소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난초는 잘 있어?
침대 옆을 보니, 순백색의 설광의 난초 한 송이가 탁자 위에 조용히 만개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