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함께 노래 부르자.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
"예쁜 꽃봉오리, 부드러운 모래, 우유와 뜨거운 빵, 사슴을 잡은 뒤 피운 모닥불,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불길."
준비해 둬야 해. 모든 건 나빠질 테니까.
"엉켜 붙은 흙더미,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어. 전쟁의 연기와 칼이 부딪히는 소리, 두개골을 타격하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네."
[player name]...
애초에 만난 게 너였으면...
화면 속 루나는 취서체의 투명한 입 안에 잠식된 상태였다. 마치 배양실에 갇힌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player name], 나와 연결해 줘.
...너무 피곤하신 것 같아요.
지휘관님?
지휘관님...그 뒤로 많이 힘드셨죠. 이럴 때 지휘관님을 방해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단말기 시스템이 전송한 데이터를 복구했습니다. 적조에서 찾은 정보의 출처는 루나 임을 확인했습니다.
창가에 서 있던 청년은 자료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고 날 발견하고는 잠깐 멈추었다.
파오스의 창 2차로 재구성된 허상으로 데이터를 점검해 봤지만, 전 지휘관님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의식에 진입했을 때 어떤 허상이 재생될지는 보장할 수 없습니다.
컨디션을 완벽히 회복한 뒤 계속 진행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시모프 측에는 제가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
파업을 거절한다는 대답을 들었음에도 리는 여전히 날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별거 아닙니다. 준비를 마치셨다면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적조에서 찾은 루나의 데이터를 확인만 하시면 됩니다.
푸흡.
지휘관님, 얼굴에...눌린 흔적이 있네요.
아! 아까 엎드려서 자다가 눌린 것 같네요. 괜찮아요. 곧 없어질 거예요. 죄송합니다.
난 손가락으로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울퉁불퉁한 흔적에 난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옆에 있던 유리창에 내 모습이 비쳐졌다. 가볍게 얼굴을 터치하는 그 모습은 기억 속 어느 한 장면과 겹쳤다.
너도...내 꿈인 거야?
네. 현재 획득한 정보로 얻은 결론에 따르면, 적조 속에서 죽을 뻔했던 의식만 포착할 수 있습니다.
인류든 구조체든 사망 전 기억 속 깊은 곳에 숨겨진 감정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이건 저희가 관찰한 대부분 적조 속 의식 단편들이 보이는 특징들과 일치합니다.
두 사람은 홍채 식별을 통해 대화를 나누며 연구실로 들어갔다.
내 동의 없이 함부로 결론 내리지 마.
실험 샘플이 부족해서 아직 결론을 내릴 순 없어.
"이건" 내가 해결할 거야.
물론 그 전제는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이 나한테 잘 협조해 주는 거지.
넌 유일하게 루나와 의식을 연결했던 지휘관이야. 아마 한 번이 아니겠지.
무슨 소리인지...
지휘관을 두둔할 생각부터 하지 마. 난 내 의심을 말하고 있는 것뿐이야.
그레이 레이븐의 어떤 전술 수단을 사용하는지도 수석 기술관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까?
네 말이 맞아. 너희들이 전장에서 어떤 수단을 사용하든 난 관심 없어. 내가 관심을 두는 건 오직 데이터 뿐이야.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겠지?
이걸 착용해. 여기에 적조에서 발견한 루나의 의식 데이터를 장착했어.
루나의 의식 데이터를 포함한 "적조" 샘플이 점검대상 "루시아"에게 줄 수 있는 반응을 시뮬레이션하고 있어.
넌 루시아의 지휘관인데다가 루나와도 링크된 적이 있지만 감정적 유대가 별로 없어서 "감독"하는데에 최적의 인원이야.
그럼 준비하도록.
데이터 로딩 중<<<<의식 연결 점검<<<<<<<
다시 두 눈을 떠 보니 길다란 복도가 시야에 들어왔다.
언니,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옆에 있던 공간에서 연약한 모습이 생성되었다.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아이가 이쪽을 바라보더니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적조 속 "의식체"는 "의식체" 그 자체가 아니라, 적조에 잠식되고 해체되어 미끼로 사용되는 도구야.
아마 그 사람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모습으로 존재하게 될 거야.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뒤에 따돌린 "루나"는 안개가 되어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내 옆에 또 다시 "루나"의 모습이 나타났다.
언니, 내가 뭘 찾았는지 봐봐! 고기 통조림이야...칭찬 안 해줄 거야?
대답하지 마.
언니, 눈이 내리고 있어! 같이 눈사람 만들지 않을래?
언니...에이취! 후훗, 조금 춥네...언니, 손이 너무 따뜻해...잡게 해줘!
수많은 "루나"들이 서 있다 사라지고 새로운 "루나"들이 생성되었다.
순진하고 즐겁고 활동적인 루나였다. 아마 여기가 루나의 기억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추억일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적조로 인한 현상임을 알고 있기에 난 환영들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너무 기뻐. 선물 너무 마음에 들어!
손이 너무 시려...손 한 번만 더 잡아줄 수 있어...?
...왜 날 무시하는 거야...
뒤에 남겨진 "루나"는 사라지지 않고 잔뜩 슬픈 표정으로 인간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잘못해서 그래...? 미안해...내가 더 잘할게...더 강해질게...날 버리지 말아줘...
내 곁에 있으면서...모든 걸 바꿔주겠다고 했잖아...?
집중해.
복도의 끝에 도착하자 주위는 암흑에 잠기고 새까만 문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끼익——
따뜻한 빛이 문틈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는데, 간소하고 낡은 인테리어의 아이 방이었다.
뭐?
아마 그럴 거야. 왜?
앞으로 다가가니 루나는 침대에 누워 편안한 얼굴로 잠든 상태였다.
금발의 어린 루나가 아닌...승격자가 된 뒤의 루나였다. 은백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에 내려앉아 있었고 그녀는 너무나 "안전"한 모습이었다.
심장박동이 빨라졌어. 뭘 발견한 거지?
"익수현상"? 그건 왜?
구조체 연구 초기단계에 이런 사례들이 있었지. 구조체와 의식을 연결을 진행했던 지휘관의 마인드 표식이 불안정하게 변하거나 양자의 상성이 좋지않으면, 구조체의 의식의 바다가 만들어낸 자아방어기제의 배척을 받게 돼.
의식의 바다를 진짜 바다로 생각해 봐. 구조체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본능적으로 손에 잡히는 사람도 물속으로 끌어내리려고 하지.
여러 이유 중 하나긴 해. 하지만 주요 원인은 그게 아니라 당시의 원격 연결 연구가 지휘관에게 회복 불가의 정신 손상을 남겼기 때문이야.
걱정하지 마. 그때는 의식의 바다에 대한 연구가 별로 진행되지 않았던 초기 상황이고, 지금 공중 정원이 만들어낸 구조체의 호환성은 그때보다 훨씬 더 성장했어. "익수현상" 같은 건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어.
그런 일이 일어나면 지휘관이 뇌사로 죽을 수도 있어. 그렇게 귀한 인재를 잃을 수 없지.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거지?
이론적으론 그렇지. 하지만 이 과제는 오랫동안 연구에서 손을 뗐었어, 왜? 뭐 새로운 아이디어라도 있는 거야?
통신 채널 속 아시모프는 차갑게 비웃더니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난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방안을 둘러보았다...따뜻하고 조용했다.
여기가 루나의 의식의 바다에 위치한 가장 깊은 곳이자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루시아는 루나와 어린 시절을 함께해 주었고, 그녀가 가장 간절하게 돌아가고 싶은 나날들이었다.
그럼...뭐 발견한 거 있어?
루시아의 대답도 너와 똑같았어. 그녀가 이미 확인해 봤는데 기억 데이터들은 루나의...뭐라고 해야 하지? 소중한 추억이라고 해야 하나?
그럼 로그아웃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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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리와 리브는 아시모프의 연구실에 남아 연구를 보조했고, 난 혼자 그곳을 떠났다.
의식의 허상 속에서 봤던 그 모습은 전에 루나의 의식의 바다에서 봤던 모습과 이상할 정도로 비슷했다.
허상 속 난...소녀의 침대 맡에 적색 빛을 내뿜는 랜턴이 있음을 발견했다. 내게 너무나도 익숙한 랜턴이었다.
그것을 통해 난 그때 의식의 바다에서 일어났던 일은 꿈이 아니었으며,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내가 바라는 것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인가는 이미 변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공중 정원 복도의 거대한 창문 너머에서 자전하고 있는 푸른행성.
저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는 푸른 행성에 사는 눈처럼 하얀 소녀.
...아직도 그 안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