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쉬——
날카로운 소리가 고막을 뚫고 대뇌 깊은 곳까지 전달되었다.
의식이 흐릿해지고 모든 색깔들이 한데 섞이기 시작했다. 냄새도 이상하게 변했다. 공기 중에서 순환액 냄새와 흐릿한 금속 냄새가 느껴졌다. 새하얀 밝은 빛이 내 눈을 가렸다.
멀리서 꿈처럼 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휘관님...
...안정제를...연결...
입을 열어 묻고 싶었지만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차갑고 녹슨 것같은 냄새가 목구멍을 가득 채웠다.
……
잠시 후, 시력이 점차 회복되었다.
마인드 표식은 강렬한 연결 상태에 처해있었다.
시야가 점차 또렷해지면서 회색 지붕과 금속 재질의 지면이 눈에 들어왔다. 모든 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었다.
그래. 여긴 기억 속 승격자 본거지와 똑같게 생겼네.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머리에서 극심한 고통이 밀려와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삐삐——!
삐삐!!
그래, 여긴 분명 꿈이야. 다음 날 아침이면 세리카가 처리해야 할 보고서를 잔뜩 쌓아두고 내가 깰 때까지 통신을 접속하겠지.
삐삐——!
삐——!
――!!
이상한 동작을 하며 가까이 오던 침식체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난 바닥에 있는 모래를 손에 쥐었고 피부에서 모래의 촉감이 똑똑히 느껴졌다.
끼익――
침식체의 발톱이 날 찌르려던 순간, 난 발걸음을 내디뎠고 미친 듯이 도망쳤다.
손은 무의식적으로 총이 있는 허리춤으로 향했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침식체가 날 찌르려던 순간, 난 발걸음을 내디뎠고 미친 듯이 도망쳤다.
파오스의 체력 훈련 과정 덕분인지 난 침식체들을 멀리 따돌릴 수 있었다.
미친 듯이 달리면서 머릿속에 이곳에서 경험했던 기억 단편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휘관님...정말 이렇게 하실 건가요?
지휘관님의 의식이 안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계속 지켜볼 수 있습니다.
통제불가의 상황이 일어나면 바로 의식 연결을 중단해...아, 이건 제가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알고 계시겠죠.
기억 속 모습처럼 강 위에 떨어진 나뭇잎이 물길을 따라 한곳에 모였다.
이건 아마 승격자와의 의식 연결일 것이다...
새하얀 장발, 창백하다 못해 투명에 가까운 얼굴, 그리고 그 속내를 알아차릴 수 없는 눈빛까지.
"지휘관님, 승격자와 의식 연결은 너무 위험합니다. 앞으로 저희가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조금은 알 거 같아. 이전에 우리 모두 이렇게 지내왔잖아. 그 어떤 미지의 상황도 우린 전부 해결했어."
지휘관님...
저한테 맡겨주세요.
"응!"
의식 속에서 기억나는 건 눈부신 빛, 고통, 어둠 뿐이었다.
사전 관찰을 통해 얻은 결론대로 이곳은 075호 도시 싱크홀이었다. 하지만 그 곳과는 뭔가 미묘하게 달랐다. 지상에 서 있는 지금, 발바닥을 통해 지하의 진동이 그대로 느껴졌다. 뭔가 작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왜 루나와 연결된 뒤 혼자 여기서 깨어난 거지?
마인드 표식은 여전히 연결 상태였지만 연결 대상은 감지되지 않았다.
――!
근처의 건물 뒤편에서 더 많은 침식체들이 나타났다. 이상한 건 침식체들은 마치 탐측 레이더라도 장착한 듯 정확하게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바로 이때, 어둠 속에서 귀신처럼 나타난 그림자가 내 앞을 막았다.
……
눈앞의 "알파"는 침묵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워 보였다. 아니, 차갑다기 보다 초점이 없어 보였다.
……
내 질문은 무시한 채 "알파"는 무기를 뽑아 프로그래밍된 로봇처럼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뒤에 있던 침식체들도 말도 안되게 갑자기 몇 배로 늘어났다.
내 앞에 놓인 태도가 자신에게 향할 때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
뒤로 물러서며 겨우 공격을 피했다. 검이 만들어낸 바람은 인간의 얼굴 피부를 베어낼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
날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알파의 외모를 가진 여성은 또 다시 날 공격했다.
상대방의 기습을 피하며 난 곁눈질로 주위에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물건이 없나 둘러보기 시작했다.
상대방의 기습을 피하며 난 곁눈질로 주위의 지형을 돌아보며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동선을 빠르게 계산했다.
...약 10여 미터 밖, 코너에서 희미한 흰색 그림자가 보였다.
……?
자연스레 나온 단어에 "알파"는 뭔가 생각난 듯 공격을 멈추었고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인간의 힘으로는 구조체와 싸울 수 없음을 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수석 지휘관으로서 난 절대적인 냉정을 유지하며 현재 상황에 대처했고 신속하게 대응 방안을 세웠다——
……
"알파"에게는 저쪽에 있는 루나가 더 흥미로운 게 분명했다. 도망치는 날 무시하고 그녀는 칼을 거두더니 루나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모든 침식체들도 명령을 받은 듯 기세등등하게 루나를 향했다. 그들의 눈에서 발사하는 붉은빛이 더 이상하게 변했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루나의 모습이 흔들렸다. 그녀를 향해 달려가는 침식체 무리를 발견한 듯 싶었다.
루나는 손을 들어 입을 막고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그녀는 돌아서서 더 깊은 어둠을 향해 달려갔다. 여리여리한 그림자는 순식간에 어둠에 잠식되고 말았다.
다행인 건 "알파"와 침식체들이 전부 그쪽을 향한 덕에 이쪽은 조용해졌다는 것이다.
달리던 발걸음을 멈추고 내 몸을 숨길 수 있는 은폐물을 찾아 멈추었다. 나에게 적대심을 가지고 있는 "그것"이 다시 나타나기 전에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그래, 그 이유 때문에 난 루나와 연결할 수밖에 없었어.
...이곳에서 일어난 모두 말이 되지 않아.
"알파"의 행동에는 분명 살의가 담겨 있었고, 진짜 "알파"라면 절대 자기 여동생한테 그렇게 할 리가 없었다. 그 "알파"는 진짜 "알파"가 아닌 것이다.
"알파"의 행동에는 살의가 가득했고 루나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에게 추격을 당하는 것 같았다.
이 모든 현상을 종합해 보면 여긴 현실 세계가 아니야. 그렇다면...
이게 바로 유일한 해석이었다.
의식의 바다가 타인의 의식과 호환성이 낮아 의식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자기방어기제를 작동시켜, 의식의 바다 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무차별 공격을 진행하지...라고 아시모프한테서 이런 사례를 들었던 것 같다.
다시 주위의 환경을 둘러보았다. 죽은 듯이 조용한 이곳을 어떻게 벗어날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길고 긴 통로에서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혼자 통로를 걷는 소녀의 얼굴에는 당황함이 가득했다.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눈치채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녀가 지나갈 때 주위의 공기는 데이터화된 블럭으로 왜곡되었다가 그녀가 지나가고 나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로봇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만 사방팔방에서 들려왔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한참 달리다 끝이 보이면 코너를 돌고, 끝이 보이면 또 다시 코너를 돌았다. 똑같은 길이 수없이 눈 앞에 나타났다.
하아...하아...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던 소리가 점차 하나의 발걸음 소리로 모아지더니 그녀와 점점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
그녀는 이런 감정이 너무나도 낯설어 자신의 긴장감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앞으로 달려갔고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
그녀의 뒤를 추격하던 적은 더 큰 악의를 가지고 그녀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녀의 뒷목에서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삐――!
……!
소녀는 급박하게 숨을 몰아 쉬며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 보았다...전자 대뇌가 외부에 드러나고 케이블 몇개로 하반신과 연결된 로봇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난 들고 있던 전자 대뇌를 옆에 내팽개쳤다.
맞은 편에 서 있는 "루나"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고 그 모습이...굉장히 끔찍하고 무시무시했다.
너...
……
…………
눈앞의 구조체 표정이 공포에 질린 표정에서 멍한 표정으로 변해버렸고 그 자리에서 고정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기의 모든 것이 너무도 이상했다.
엄청난 살상력을 가지고 있는 승격자의 리더가 마치 어린 소녀처럼 어쩔 줄 몰라하며 자리에 서 있었다. 이런 "어쩔 줄 몰라"함은 전염이 될 수 있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너는...!
……
...나쁜 사람이...아니야?
난...루나야. 하지만 당신은...
...나쁜 사람이...아니야?
가까이..오지 마...
루나의 표정은 현실에서 봤던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루나는 갑자기 도망치기 시작했다.——손을 뻗어 잡으려고 했지만 그녀의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이 내 머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눈앞의 풍경은 큐브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지면은 왜곡되고 마치 그림처럼 접히기 시작했다. 루나는 낮은 비명을 지르더니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는 나뭇잎처럼 순식간에 왜곡된 공간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