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M 23:23 공중 정원 센터 지휘부 밖
일 처리를 끝내고 지휘부를 떠나려는 순간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 지면서 무언가에 목이 붙잡힌 채 길가의 가로등 밑으로 끌려갔다.
말을 잘 안 듣네.
베라의 칼이 목에 겨누어지자 칼날의 싸늘함과 날카로움, 그리고 가늘지만 힘 있는 손가락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손 봐줘야 깨닫나 보네. 그런 거야?
말을 이으면서 목에 겨누어진 칼에 힘이 들어가면서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눈앞의 구조체의 붉은 눈동자는 마치 빛이 나는 듯 이쪽을 노려보며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와서 비는 거야?
하지만 아쉽게도 네가 빌수록... 난 흥분되거든!
팔을 들어 베라의 팔꿈치를 치자 옆으로 피했다. 그리고 그 틈에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
그래도 시치미 뗄 생각이야? 그럼 나도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네.
최근에 나를 조사하고 있지?
묵인하는 건가?
난 나에게 거짓말하는 사람이 가장 싫어.
말을 이은 베라가 손에 든 칼로 공격해 왔지만 간신히 피했다.
"적당히"를 모르는 건가? 어리석네.
……
베라의 말투가 가라앉으면서 움직임도 갈수록 더 거칠어졌다.
그래서. 어쩔 건데?
하... 내가 그런 거로 고통을 유지해야 된다고 생각해?
전장이 얼마나 참혹한지 넌 하나도 몰라.
그래? 그럼 자신의 대원이 눈앞에서 산산조각나고 침식체에게 뜯기는 걸 본 적 있어?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그 절망을 알아...?
죽고 다시 태어나봤냐고!
베라의 공격에 점점 벽으로 밀리면서 도망칠 수 없는 압박감이 짓눌러왔다.
병사들은 무감각해졌어. 전장에 들어선 순간 마치 좀비나 다름없어. 그레이 레이븐, 네 손에는 최정예 병사가 있지. 넌 전쟁이 어떤 것인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그런 신념조차 없는 병사로는 이 세상에서 퍼니싱을 무찌를 수 없어.
전장에서는 이를 악물고 버텨야 해. 아니면 죽음뿐이야.
난 그 중의 선택을 위해 가능성을 높인 거뿐이야.
...하하...
하, 지휘관, 순진한 건지 어리석은 건지 모르겠네...
그럼 이렇게 말해볼까? 구조체라고 해도 그렇게 쉽게 패배를 인정하는 건 치욕이야.
전장에 살아있어야만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니까.
우습네. 네가 나에게 뭐라 할 자격은 없어...
그들이 죽든 말든 상관없어! 내가 임무를 완수하는 걸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팔을 들어 베라의 팔꿈치를 부딪치자 베라가 든 칼이 떨어졌다. 그 틈에 거리를 둔 후 베라의 팔을 확 잡고 다른 손으로는 베라가 든 칼을 내리쳤다.
쨍그랑——
단도가 땅에 떨어지면서 맑은 소리를 냈다.
베라는 두 손이 잡히자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이렇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지휘관, 얼마나 더 붙잡고 있을 생각이지?
손이 자유로워진 베라는 무언가 가리키는 듯 자신의 목을 만졌다.
그녀를 따라 목을 만지니 차가운 액체가 느껴졌다. 손을 눈앞으로 뻗은 후에야 어느샌가 피를 흘렸다는 걸 알았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고 저리기만 했다.
베라가 정말 죽일 생각이었다면 구조체인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너 같이 순진한 사람과 무슨 말을 하겠어... 하, 이건 인사일 뿐이야,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베라가 한 글자씩 내뱉었다. 그 말에는 저항할 수 없는 위압감이 넘쳤다.
내 개인적인 일에 간섭하지 마.
그렇게까지 말하니 널 포장해서 내 방으로 보내봐.
그러니 쓸데없는 간섭은 그만둬.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런, 설마 엮일까 봐 두려운 건 아니겠지?
너의 이름을 거래인으로 삼았다는 건 처음부터 거짓말이었어.
설마 진짜로 받아들인 건 아니겠지?
귀엽네.
베라는 바보 취급 당한 모습을 보는 게 즐거운지 지휘관의 머리를 툭툭 쳤다.
됐어. 놔줄게.
네 이름으로 거래한 적 없어. 그러니 내 눈앞에서 사라져.
그래도 한 가지 경고해둘게. 또 다시 날 몰래 엿보면 다음에는 이렇게 좋게 끝나지 않을 거야.
그래.
그렇게 말한 베라는 생각에 잠긴 듯 이쪽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래도 또 무언가 꾸미고 있는 것 같았다.
아, 생각을 바꿨어.
내일 이 시간에 C동 실험동 F23-C04에서 봐.
C동은 실험실이 있는 곳으로 카드가 없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베라가 왜 그곳에서 만나기로 한 건지 모르겠다.
오면 알아.
베라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뱉은 후 멋대로 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