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늦었어"라고 방금 말했지만, 크롬은 분명 도서관을 떠난 후 나와 헤어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네, 지휘관님과 저의 대국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기울여 그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크롬의 깊은 생각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어쩌면 그때부터 생각해 왔는지도 모른다.
내가 만약 그와 같은 학년의 학생이라면 분명 오늘과 같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함께 책을 읽고, 함께 이런 주제를 토론하며, 함께 학교 훈련장에서 걷고 함께 방과 후에 교실에서 체스를 뒀을 것이다.
왜냐면 나와 그는, 과거 다른 시간의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들을 많이 해봤기 때문이었다.
……
전에 우연히 만났던 장소로 돌아왔다.
각자 자기 자리에 앉았다.
홀로그램 체스판이 밝아졌다.
체스판 위에 체스 말들은 여전히 잠시 멈출 때의 위치에 놓여 있었다.
전에 저였으니깐 이제 지휘관님 차례입니다. [player name]님.
흰색 나이트, h4에서 f5로 이동.
검은색 폰, c7에서 c6으로 이동.
기분이 좋아졌다는 개념은 평소에 없습니다. 감정은 두 번째이기 때문이죠. 저는 단지 몇 가지 일을 이해했을 뿐입니다.
흰색 폰, g2에서 g4로 이동.
검은색 나이트, h5에서 f6으로 이동.
체스는 마저 두고 이야기하죠.
흰색 나이트, h1에서 g1로 이동.
……
체스판의 전황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
마지막——
흰색 퀸, f3에서 f6으로 이동.
크롬은 움켜쥔 손을 입술에 대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휘관님은 11번째 수에서 자신의 비숍을 희생시켰습니다.
지휘관님은 18번째 수부터 자신의 룩을 희생시켰습니다.
지금 지휘관님은 자신의 퀸을 희생시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지휘관님의 말들이 저보다 많이 적네요.
네.
그는 g8의 검은색 나이트를 집어 미끼인 흰색 퀸에 올려놨다.
나는 별 생각 없이 d6의 비숍을 집었다.
e7에 올려놨다.
대국이 끝났다.
크롬의 얼굴에는 아무런 서운함이 없었고, 나의 얼굴에도 아무런 기쁨이 없었다.
서로의 얼굴만 오랫동안 응시하며 다시 한번 함께 웃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할 계획이었던 겁니까.
그럼 처음부터네요.
네.
사실 나와 크롬은 대대로 전해지는 대국을 재연하고 있었다.
이것은 승부이면서도 승부가 아니기도 하다. 체스 기술의 대결이 아니라 심리의 대결이었다.
양측 모두 서로의 다음 수가 자신의 뜻대로 될 것이라는데 걸고 있었다.
체스판에 있는 체스 말의 수보다 체스 말이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분명 누군가는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개척할 것이다.
항상 누군가가 당신의 생각을 이해하고, 당신과 함께 새로운 길을 개척할 것이다.
그게 동종이든, 돌연변이든 상관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미래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크롬은 구조체이고, 나는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네, 바로 제 앞에 앉아있죠.
크롬의 두 눈이 나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고, 푸른 눈은 바다처럼 넓었다.
네, 지휘관님 뿐만이 아닙니다.
더 많은 사랑과 선의가 없다면, 과학의 힘은 단지 인류가 서로에게 피해를 입히는 능력만 키울 뿐이다.
그렇다. 만약 더 많은 사랑과 선의가 없다면.
하지만 인간 모두가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생물은 아니다.
언젠가 또 이런 체스를 둘 수 있을까요? [player name]님.
대국의 상대 또한 서로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입장에 서 있더라도 약속이나 한 듯이 같은 길을 택할 수 있다.
나는 정중히 그와 약속을 했다.
이러한 대국은 무수히 많을 거라고.
서약이자 맹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