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됐고, 여과탑이 적막 속에서 가동되고 있었다. 차질 없이 재건이 추진됐고, 물자가 공급되면서, 보육 구역의 주민들은 마침내 두려움과 걱정 없이 잠을 청할 수 있게 됐다.
오늘 밤은 평소보다 밝은 보름달이 떴다. 그래서인지 어른들은 아이들이 밖에서 좀 더 놀게 놔뒀고, 하루의 재건 작업을 마무리한 주민들이 모닥불 주위로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어느새 주위에 둘러앉아 눈을 깜빡이며, 내가 이야기해 주는 집행 부대의 전투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모든 걸 말해주기에는 좋지 못했다. 보육 구역의 아이들도 충분히 잔혹한 현실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다음에는요? 괴물이 그렇게 강한데, 카레니나 언니는 어떻게 싸울 수 있었어요?
어떤 이야기를 해주시길래, 아이들이 이렇게 좋아하나요? 저도 들어봐도 될까요?
보육 구역의 담당자가 식은 찌개 한 그릇을 들고, 다가와 아이들 곁에 앉았다.
리 형은 권총 두 자루로, 400km 밖에 있는 침식체의 자동 포대를 명중시킬 수 있어요.
조나단은 벌떡 일어나, 손에 쥐고 있던 작은 플라스틱 권총을 들고, 총을 돌리는 동작을 취한 뒤, 멋지게 총구를 향해 "후" 불었다.
루시아 언니의 칼춤은 공간을 빙결시킬 수 있어요!
켈리는 손에 쥔 나무칼을 치켜들고 그럴듯하게 자세를 잡았다. 켈리는 구조된 이후로 열심히 전투 기술을 익혔다고, 담당자가 말했던 게 기억이 났다.
리브 누나는 공중에서 부유 캐논 8대를 동시에 조종할 수 있어용!
아이들은 담당자에게 누가 들어도, 과장된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일화를 쉴 새 없이 반복했다. 담당자는 이야기를 듣고는 몸이 앞뒤로 흔들릴 정도로 웃었고, 얼굴에 띈 피로도 모닥불의 따뜻한 빛 속으로 말끔히 사라졌다.
다만.
아이들의 상상력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풍부했다.
특히, 리브가 무사시 구형을 쓰러트린 부분은 압권이었다.
그런데도, 나 역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과 똑같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왕 누나는 대포로 정말 멋진 불꽃을 만들 수 있어요!
지휘관님, 왕 누나가 한가해지면, 우리랑 같이 왕 누나한테 가서 공연해달라고 말해줄 수 있어요?
라이트는 자신의 무인기를 끌어안고 신이 나서 앉았다. 그제야, 무인기 기체에 사나운 표정의 토끼가 마커로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머릿속에 험악한 표정과, 위아래로 펄럭이는 토끼 귀 모양의 역원 장치를 가진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뭐가 비슷한데?
뭐?!
화내는 목소리가 엄청 비슷한 거 같았다. 아니...
고개를 돌리자, 무인기에 그려져 있던 토끼와 똑같은 표정의 카레니나가 서 있었다.
카레니나 누나 왔당!
카레니나가 화내기 전에 재빨리 부인했다. 다행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의심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레니나를 따라오던 기계 엔지니어가 숨어서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눈빛을 보고는 능청스럽게 두어 번 기침을 한 후,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이상한데, 됐다!
담당자가 그러는데, 날 찾았다면서?
어딘데요? 저도 갈래요. 데리고 가주세요~
라이트는 떼쓰며 펄쩍 뛰었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엔지니어에게 제지당했다.
둘만의 데이튼데, 너 같은 어린아이가 끼기는 왜 끼니. 앉으렴.
데이트라.
카레니나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졌다. 그리고 "내게 설명 좀 해줄래?"라는 듯한, 굳은 얼굴로 나를 봤다.
알았어.
카레니나가 화내는 게, 걱정돼서 해명하려고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카레니나의 표정에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지만, 머리 위에 역원 장치가 번쩍 치켜세워졌다.
정말! 어딘데, 빨리 가자!
카레니나는 포기한 듯, 내 손을 잡고선 모닥불이 비치지 않는 곳까지 걸어갔고, 어둠 속에서 약간 붉어진 그녀의 귀만 보이게 됐다.
뭐!
카레니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내 손을 잡은 채, 앞으로 걸어갔다.
……
다음엔 일찍 말해!
카레니나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와서, 대관람차 앞에 섰다.
날 왜 이곳에 데려온 거야?
제어실로 와서 안전 점검을 한 후, 대관람차의 동력 시스템을 한 단계씩 가동했다.
엔지니어와 함께 몰래 리허설을 한번 해봤지만, 그래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익숙한 대형 설비가 작동하는 소리를 들은 카레니나의 눈앞이 갑자기 밝아졌다.
방금까지 어둠 속에 숨어있던 대관람차가 천천히 돌기 시작했고, 화려한 색상의 네온사인이 켜지면서, 쓸쓸했던 광장을 환하게 비췄다.
밤바람이 카레니나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고, 눈앞의 모든 것이 동화처럼 환상적이었다.
이, 이거 네가 한 거야?!
그런 거였군요. 대관람차 복원하신다는 게.
네. 대장이 말한 게 맞습니다. 이런 대관람차는 독립 배전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 대관람차는 보존 상태도 좋고, 구조도 견고해서, 큰 어려움 없이 재가동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당연히 문제없습니다.
다 같이 대장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주도록 하시죠!
아닙니다. 바빠도 해야죠.
대장 혼자서 며칠 분량의 재건 계획을 다 끝낸 상태라, 아직 여유가 있습니다.
기계 엔지니어는 머리를 긁적이며, 약간 허탈한 듯 웃음을 지었다.
……
대관람차의 탑승 칸 앞으로 가서, 카레니나에게 손을 뻗었다.
네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한 번 해보도록 하지!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카레니나가 오히려 순순히 나보다 앞서 탑승 칸으로 뛰어 들어갔다.
대관람차가 조금씩 높아지면서, 시야도 함께 넓어졌다.
아래 보이는 보육 구역이 블록 크기로 변했고, 지평선이 저 멀리에서 아른거렸다. 수송기를 타고 오가는 동안, 지표면을 내려다보는 것이 습관이 됐지만, 이렇게 느리고 평화로운 상승은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 순간, 이 작은 한쪽의 세상에서 모든 위험과 걱정이 잠시나마 멀리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 대관람차를 수리할 생각을 어떻게 한 거야?
손을 뻗어 저 멀리 있는 지평선을 가리켰다.
발밑의 보육 구역부터 우뚝 솟은 여과탑, 복원된 가로등, 재건 중인 공사 현장까지,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따뜻한 빛깔의 불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별빛 같으면서도 가늘고 질긴 그물같이, 서로 연결되면서 시야의 끝까지 이어졌다.
불빛.
카레니나는 발밑의 별빛을 응시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깨달았다.
황금시대의 도시는 야심한 밤에도 등불이 밝게 빛나고, 어두운 밤을 밝히는 불빛들이 우주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고 할아버지가 말한 적이 있어.
하지만 구조체가 된 뒤, 공중 정원에서 바라본 지구는 암흑뿐이었어.
대관람차가 맨 꼭대기에 잠시 머물게 되면서, 도시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자, 카레니나는 탑승 칸의 난간을 짚고 먼 곳을 바라봤다.
와, 저기 봐봐!
저 도로가 수리되면, 세 분기점 간의 물자 왕래가 가능하게 돼.
73호 보육 구역에는 규모가 큰 농장이 있고, 우리가 있는 이곳에 임시 병원도 곧 완공될 예정이고, 서부 거점의 에너지 스테이션도 가동되고 있어.
이렇게 되면, 모두가 각 분기점의 자원을 교환하면서, 자급자족할 수 있어.
점이 이어져서 선을 이루고, 선이 모이면 면을 이루게 될 거야. 횃불을 넘기듯, 지구 곳곳에서 다시 불이 켜질 거야.
지상의 빛을 잡으려는 것처럼 손을 내밀자, 카레니나의 입가가 올라갔고, 눈에는 자랑스러워하는 눈빛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난 이걸로는 만족 못 해!
언젠가 우리는 다시 집을 되찾을 거고, 도시 곳곳에 불을 밝힐 거야. 그리고 그걸 위해서, 정비 부대는 현재든 미래든 계속해서 싸울 거야!
카레니나는 자신의 기대를 쉴 새 없이 말했고, 그녀의 눈은 어떤 등불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왜 그렇게 나를 쳐다보는 거야!
흥, 이제서야 알게 된 거야? 그래도 아직 늦지는 않았네.
난 더 잘할 수 있으니까, 항상 잘 지켜봐!
……
달빛에 비친 카레니나의 볼에 붉은빛이 보였다. 그리고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결국에는 귀가 빨개진 채 고개를 숙였다.
바보. 그녀가 얼굴을 다 돌리기 전에, 이렇게 말하는 입 모양을 본 것 같았다.
대관람차가 지상에 도착하려고 하자, 멀리서 어린아이들이 엔지니어와 담당자를 데리고 이쪽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대관람차의 불빛이 재가동되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너무 빠른데.
이 대관람차! 돌아가는 게 너무 빠르다고! 조금만 있으면 끝나는데, 재미가 없잖아!
나는 아직... 아아! 내일 무조건 다시 조정할 거야! 너도 같이 와야 해!
빨리 돌아가서 쉬어. 내일도 할 일이 산더미란 말이야. 잠 못 자서, 내 발목을 잡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
카레니나는 탑승 칸에서 뛰어내린 뒤, 이쪽을 향해 활기차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앞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