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중했던 임무가 끝난 뒤, 의회는 대부분의 지휘관에게 며칠간의 휴가를 허락했다.
외근 갈 일은 없어졌지만 테이블 위에는 서류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아무리 봐도 휴가는 물 건너 간 것 같고 평소에 처리하지 못한 서류를 처리해야 숨 쉴 겨를이 생길 것 같았다.
이런 시간은 마치 흐르지 않는 물과 같았다. 도전이란 찾아볼 수 없고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었다...
지휘관!
지, 휘, 관!
지휘관, 여기 있어?
얼굴을 보기도 전에 목소리가 먼저 전해왔다. 역시 나나미답다. 하지만 이 시간에 여기로 왔다는 것은...
"펑!"
나나미는 대문 수리 명세서에 익숙하게 서명하고 생기발랄하게 내 앞으로 다가왔다.
지휘관, 역시 여기 있었네!
나나미가 오늘 지휘관의 보좌관이거든. 크흠...
나나미는 그럴듯하게 목청을 가다듬었다.
나나미, 준비 완료! 지휘관, 무슨 지시가 있는 거야?
그럼 나나미한테 무슨 일 생기면, 지휘관에게 도움을 청할게.
아니더라도 지금은 맞아. 나나미가 무슨 일이 생기면 지휘관에게 도움을 청할 거니까.
"그래도 보좌관이라고 할 수 있니?" 마음 속으로 의심을 했지만 역시나 성실하게...
해당 인간의 말투와 체온 변화를 분석한 결과, 목표 인간이 계속해서 현재 작업을 진행할 것으로 예상되는 수치는 0.543%입니다.
전류의 찌지직거리는 낯선 기계 음성이 복도에 갑자기 울려 퍼졌고 그러는 바람에 화들짝 놀랐다.
하하하! 지휘관, 재밌지? 이건 나나미의 새 친구, 마이보야.
하하하, 지휘관, 마이보 때문에 놀란 거야?
나나미는 사무실 주인의 의견 상관없이 다짜고짜로 거대한 "사무실 의자"를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마이보의 메인 부품은 사무실 의자였고, 그 주변에는 다양하고 복잡한 전기회로, 스크린과 조작 콘솔이 연결되어 있었다.
낡은 부품, 벗겨진 페인트칠, 얼룩덜룩한 녹슨 자국...
나나미가 몇 세기 전에 존재했던 낡은 운송 장비의 운전석을 통째로 빼서 이곳으로 옮기지 않았나 의심할 정도다.
가까이 다가선 후에야 그중 작은 전자관 스크린에 희미하게 번쩍이는 형광색 미소를 보았다.
아니야!
정확히 말하자면, 마이보는...
마이보는 사용자 친화적인 진정한 메타버스 의자입니다. 나나미 님께서 당신을 즐겁게 해주려고 만든 착한 아이랍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player name]님.
당신은 저를 모르시겠지만, 전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하고 싶은 게임이 있습니다.
마이보! 지금 말참견까지 배운 거야?!
마이보는 낮아지는 전류 음을 냈고 억울하면서도 답답한 듯, 스크린 위 형광색 눈꼬리가 내려갔다.
지지... 직, 마이보가 잘못했습니다. 마이보는 착한 아이입니다. 나나미가 말할 때 참견을 하면 안 됩니다.
크흠... 어쨌든 마이보가 말한 것처럼, 마이보는 나나미를 도와 각종 장면을 재현해 줄 수 있거든.
VR처럼 간단한 게 아니거든, 사실 나나미가 일부 지혜를 마이보에게 빌려줬어!
그래서 마이보는 현재 VR 장비로는 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어.
공중 정원의 물자 관리가 참 엄격하단 말이지. 나나미가 올린 물자 신청이 모두 거부당했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재활용 쓰레기장을 전부 훑어서 겨우 마이보의 연산을 확보했어.
지휘관, 예전에 나나미하고 데이트했던 거 기억해?
소녀는 갑작스레 화제 전환을 했다. 그러자 추억이 떠올랐다...
첫 번째! 회전목마! 계속 타고 있으면 하늘로 날아갈 수 있대!
그다음은 귀신의 집에 가보자... 근데 영혼이라는 건 너무 비현실적이잖아.
세 번째는 롤러코스터. 중간에 궤도가 끊어지면 엄청 짜릿할 거야!
전부 중간에 고장 나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재미있었어!
힝! 빨리 나나미에게 그쪽 손가락을 펼쳐봐!
아... 끊어졌네.
다행히도 그때 나나미가 잡은 것은 마네킹 모형의 손이었다...
지휘관도 기억난 것 같은데?
하지만, 나나미 생각엔 그때의 데이트는 많이 부족했던 것 같아!
나나미도 잘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역시 부족해!
지휘관과 데이트하는 건 즐겁지만, 나나미는 뭔가 자꾸 부족한 느낌이 들어.
나나미가 오랫동안 생각을 해봤는데 지금 그 이유를 알 것 같아.
데이트 장소 때문에!
전에 데이터베이스에서 봤던 데이트 장소는 모래사장, 영화관, 가로수길 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부 없어졌어.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나미가 특별히 마이보를 만든 거야.
나나미가 마이보에 지휘관과 같이 데이트하고 싶은 장소를 많이 추가했는데, 총... 어... 얼마였지?
보고드립니다. 나나미는 마이보에 총 4294967296개의 장소, 65536종류의 기후 환경과 18446744073709551616종류의 돌발 상황을 메모리에 업로드하셨습니다.
그래? 나나미가 그렇게 많이 저장했다고?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바로 시작하자. 지휘관, 어서 앉아봐.
나나미가 마이보를 두드리자, 좌석이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제멋대로 교차된 파이프 라인을 통해 미약한 전류가 스쳐 지나갔다.
^_^
응?
나나미가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냈다.
그런 건 잠시 놔둬도 되잖아. 게다가 지휘관은 이런 문서들 싫어하잖아?
걱정 마. 마이보는 진짜 안전해. 안전하지 않다고 해도 나나미가 있잖아!
지휘관, 나나미랑 같이 있어주면 안 돼? 나나미도 이번 기회에 지휘관에 대해 더 알고 싶단 말이야.
나나미는 다짜고짜 나를 끌고는 마이보로 향했다. 인간의 완력만 가지고 있는 난 구조체인 그녀에게 속수무책으로 끌려갔고 강제로 좌석에 착석하게 됐다.
마이보는 보기엔 허름했지만, 앉게 되니 생각 외로 편안했다.
만족하는 것도 잠시, 나나미는 내 머리를 완전히 덮을 수 있는 금속 헬멧을 내게 씌웠다.
"뚝"
두꺼운 금속이 빛을 차단했고, 난 헬멧 안의 녹 비린내와 답답한 어둠만 느낄 수 있었다.
지휘관, 준비됐어?
금속 헬멧으로 들려오는 말소리가 철에 부딪혀 반사됐고, 웅웅거리는 메아리는 내 두개골을 울리게 했다.
하지만 상대방의 기쁨과 절박함을 느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내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난 이 상황을 그냥 운명이라고 단념하며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럼, 연결 시작!
지휘관, 우리 그쪽에서 만나.
귓가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길게 울렸다. 현실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 되었지만, 몸을 받치고 있는 좌석이 밀리는 느낌을 받았고, 의식은 심해나 우주에 발생한 거대한 소용돌이에 있다가, 거대한 하얀 빛과 충돌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