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제몽·그중 일곱
꿈과 현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수막이 드리워져 마치 깊은 바다에 잠긴 것 같았다.
귓가에 맴도는 여음은 깊고 무거운 박자로 귓속 깊이 스며들었다.
희미한 불빛이 깜박이는 작은 오두막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곳이 리브의 “비밀 기지”라는 사실을 떠올리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아... 드디어 깨셨네요?
입을 열자마자, 마치 바닷물을 삼킨 것처럼 기침이 터져 나왔다.
리브가 지휘관님을 데려오라고 했어요. 여긴 마을과 멀어서 폭풍을 잠시 피할 수 있다고 하네요. 다른 곳은 이미 물에 잠겨버렸거든요.
지휘관님 덕분에 안정을 찾았어요. 마인드 표식의 출력이 너무 높아서… 리브가 폭풍 속에서 지휘관님을 발견했을 땐 이미 의식을 잃으신 상태였어요.
그래서 저를 보내 지휘관님을 데려오게 한 거예요. 지금 마을 중심은 너무 위험해서...
아마 풍차 탑에 있을 거예요. 그 탑은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아서 지금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어요. 그녀가 지키고 싶어 하는...
베르메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휘관이 비틀거리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귀를 감싸고 있던 수막이 터졌다. 차가운 빗방울이 파도처럼 몰려와 숨 쉴 공기를 마구 앗아갔다.
그 순간, 지휘관은 방금 전까지 느꼈던 깊은 바닷속의 질식감의 의미를 깨달았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운송 장비는 난민 대피에 거의 다 동원됐어요. 지금 걸어서 마을까지 가려면 최소 한 시간은 걸릴 거예요. 그것도 태풍이 잠잠할 때 얘기죠…
베르메르의 만류에도 지휘관은 몸을 낮추고 발뒤꿈치를 진흙 속에 박은 채, 팔로 바람을 가르며 힘겹게 마을 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거센 바람과 폭우가 온몸을 두들겼고, 균형을 잃은 지휘관은 다시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흐릿한 빛 속에서 그 작은 그림자가 미소 짓고 있었다.
지휘관은 몸부림치며 일어난 뒤 비틀거리며 앞으로 달렸다. 두 팔을 뻗어, 멀리 있는 리브의 모습을 꼭 껴안으려 했다.
하지만 두 손은 허공을 가르고, "쾅"하는 소리와 함께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혔다.
그건 나뭇가지에 눌려 있던 비행선 "회색 깃털-537"이었다.
꼬마 정령들아, 나 대신 그 사람을 찾아줄 수 있어?
너희들이 그 사람을 축복해 줘. 그가 어디에 있든, 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늘 행복하길…
비행선은 폭풍의 바닷속에서 지휘관과 함께 가라앉았다. 하지만, 비행선도 지휘관도 여기 머물러선 안 됐다.
"하늘로 돌아가. 그리고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지휘관이 미친 듯이 나뭇가지를 치워내자 상처투성이가 된 회색 깃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세히 보니 나뭇가지에 눌린 것 외에 페인트만 좀 벗겨졌을 뿐... 중요한 부분은 손상되지 않았다.
아이고... 내 포대... 드디어 누군가가 나뭇가지를 치워줬네.
당연하죠. 이 오랜 세월 동안 저희가 계속 관리해 왔어요!
옛 주인님의 명령이었거든요. 꼬마 주인님이 언젠가는 이 비행선을 타고 날 거라고, 그리고 언젠가는 이곳으로 돌아올 거라고요...
하지만 꼬마 주인님이 보이지 않아요.
안토니아가 남긴 비행선으로요?
회색 깃털이 강풍에 견디도록 설계된 기종이라고 해도 태풍 속을 나는 건 너무 위험해요. 순간적인 돌풍만으로도 치명적일 수 있어요!
폭풍우는 금세 지나갈 거예요. 지금도 바람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어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죠. 리브도 무사할 거예요.
네?
울지 마요… 울지 마요…
어린 리브를 혼자 바람 속에 남겨두었다.
지휘관님, 고마워요... 리브는 먼저 가볼게요...
순백의 리브가 혼자 전장으로 뛰어드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부드러운 심장을 베어내는 것처럼 아픈 기억, 그녀는 언제나 운명에 정해진 것처럼 혼자 떠나갔다.
...
둘 다 꼭 무사히 돌아오세요.
회색 깃털을 잘 데리고 돌아오셔야 해요. 저희가 수년간 정성껏 돌봐온 녀석이니까요.
지휘관, 베르메르, G94가 함께 비행선을 개활지로 밀어냈다. 바람과 빗물이 뒤섞인 공기 속에서 지휘관은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손을 흔들고, 조용히 탑승 문을 닫았다.
지휘관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조종간을 밀었다. 엔진의 굉음이 점점 커지더니, 거센 바람 속에서 스스로 에너지를 끌어올리듯 진동했다. 이제는 사람의 손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비행선이 앞이 보이지 않는 장대비를 뚫고 위로 떠올랐다. 가슴이 철렁하는 무중력감과 함께 회색 깃털이 이륙에 성공했다.
다음 순간, 눈앞의 풍경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나무, 비, 하늘, 모든 것이 기묘한 곡선으로 뒤얽히며 시야 속에서 회전했다.
지휘관은 이를 악물고 최대한 침착하게 조종간을 움직여 회색 깃털의 기체를 안정시키려 했지만, 죽음의 물보라는 코와 입으로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엔진의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회색 깃털이 나무 꼭대기를 간신히 스치며 지나갔다. 그리고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그랬어요. 종이비행기들은 바람의 꼬마 정령이라고…
어느새 회색 깃털은 바람의 방향에 맞춰 자동으로 날개를 조절하며 안정을 되찾았다.
저를 찾아오는 길에 이 아이들이 함께 있어 줄 거예요. 지휘관님을 따뜻하게 감싸면서, 제게로 인도해 줄 거예요.
난기류가 여전히 오장육부를 뒤흔들었지만, 비행선은 무사히 폭풍의 꼭대기를 향해 나아갔다.
순백의 소녀가 홀로 풍차 탑 꼭대기의 성당을 거닐고 있었다. 그녀의 발밑에는 낡은 책장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춤추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곳, 바람의 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신의 소원을 적어 바람에 띄워 보냈다. 그중 일부는 사람들에게 잊히고, 나머지는 돌고 돌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쿵, 쿵... 거대한 망치로 내려치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한때 수많은 사람을 축복하던 바람의 신의 집은, 이제 폭풍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후... 후...
기체의 양력을 이용해 작은 유도면을 만들어 성당에 가해지는 바람의 압력을 줄였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탑은 간신히 버텼지만, 바람은 여전히 신의 창처럼 성당을 꿰뚫고 있었다.
책장이 하늘을 뒤덮었다.
누렇게 바랜 종이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들로 빼곡했고, 가장자리와 중앙 부분은 닳아 희미해져 있었다.
리브는 그 "잃어버린 소원들" 사이를 걸으며 한 장, 한 장 책장을 주워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소녀의 소원은 무엇일까?
바람의 신님, 보시다시피 폭풍우가 다시 윈치스를 덮쳤어요. 숲은 번개의 아래에서 신음하고, 푸른 하늘은 폭우 속에서 울고 있어요.
이 바람 속에서… 저는 다시 어머니의 얼굴을 봤어요. 병약한 얼굴로, 하지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던 그 마지막 모습이요.
기체의 에너지는 바람을 가르며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전 한 번도 당신께 무리한 부탁을 한 적이 없어요.
전 가진 게 많지 않아요… 그저 제가 사랑하는 이들이 당신의 바람 속에서 보호받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러니... 더는 [player name] 님을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 작은 까마귀가 제 곁을 떠나지 않게 해주세요.
더는 그가 세상을 떠돌지 않게 해 주세요.
리브는 천천히 두 손을 내리고, 기도를 마친 뒤 조용히 몸을 돌렸다.
당신의 바람이 언제까지나 우리를 축복하길.
한 걸음, 두 걸음... 리브는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것을 느꼈다. 발밑이 흔들리고, 무중력감이 몸을 끌어당겼다.
팟... 품에 안겨 있던 책장들이 모두 흩어지며 성당 천장 위로 하얗게 날아올랐다.
리브는 그 아름다운 책장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의 꿈속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처럼 [player name]을(를) 꼭 껴안으려 했지만, 그는 바람에 흩날린 종잇장처럼 손끝에서 사라졌다.
[player name] 님?
혼란 속에서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리브는 무심결에 창밖을 바라보았다.
탑 주위는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장대비에 가려 대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창밖의 바람은 점점 더 차가워졌고, 리브는 결말이 없는 슬픈 동화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의식의 바다 저편에서 울려오는 목소리에 리브는 멈칫하며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지만... 풍경은 변함없었고, 대지는 텅 비어 있었다.
지휘관님!
네?
리브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건 꿈같은 광경이었다.
혼탁하게 뒤엉킨 먹구름 사이로 간혹 작은 틈이 열리며 저 높은 하늘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 가느다란 빛줄기가 몸부림치듯 구름층을 뚫고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리브를 아주 많이 사랑해 줄 사람도 만나게 될 거야.
그 사람은 바람을 타고 "휘익" 리브에게로 날아올 거야.
그가 왔어요…
작은 은빛 광점이 마치 정지한 듯 빛줄기를 따라 내려오더니 주저 없이 리브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왔다.
비행선의 항해등이 찬란하게 빛나며 역주행하는 유성처럼 긴 궤적을 그리더니, 굽이치는 구름 속으로 그대로 돌진했다.
다음 순간, 그 빛은 짙은 회색 어둠에 삼켜졌고, 리브의 심장도 그와 함께 덜컹 내려앉았다.
지휘관님, 조심하세요!
회색 깃털을 몰고 폭풍우 속을 헤쳐 나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닫는 순간, 지휘관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녀의 심장을 조여왔다.
은빛 광채가 다시 구름바다 위로 솟아올랐다.
리브는 반사적으로 기체의 양력을 이용해 지휘관 쪽으로 날아가려 했지만, 창밖으로 몸을 내미는 순간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리브의 기체로는 이 폭풍우를 가로지르는 것이 불가능했다.
리브는 긴장된 눈으로 불빛을 쫓았다. 눈 깜빡이는 사이에 그 빛이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성당 안의 책장이 바람에 펄럭이며, 동화 속 작은 까마귀처럼 리브의 주변을 맴돌았다.
전, 이런 결말을 원하지 않아요…
저는 누구보다 지휘관님을 만나고 싶고, 그 누구보다도 지휘관님 곁에 있고 싶어요.
지휘관님이 작은 까마귀처럼 제 눈앞에서 사라지는 건 싫어요.
그러니까… 안전하게 착륙하실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테니… 약속해 주세요, 제발…
지휘관의 목소리가 의식의 바닷속에서 울려 퍼졌다.
비록 어머니는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 쓰지 못하시지만, 우리에겐 아직 긴 시간이 있잖아요.
회색 깃털,
그것은 강풍 속에서 태어난 비행선이자
리브를 향해 자라난 한 쌍의 날개
그리고 안토니아가 남긴 마지막 축복이었다.
하지만 작은 까마귀는 이미 종잇조각이 되어 바람에 흩어졌어요. 그를 다시 찾으려면 소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격류를 뚫고 날던 지휘관이 천천히 입을 열어, 미완성인 동화를 이어갔다.
하늘 높이 날아간 작은 까마귀는 수많은 종잇조각이 되어 거센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작은 까마귀야, 어디에 있니?
그때, 그녀는 앞쪽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별빛을 보았다.
그 빛은 그녀를 인도하여 작은 까마귀의 종잇조각을 하나둘 찾을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작은 까마귀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소녀는 모든 힘을 소진하고 말았다.
여긴 너무 추워… 그러니까, 제발… 더 이상 머물지 말고 돌아가. 네가 있던 세상으로 돌아가.
하지만 내 날개는 이미 더 이상 날갯짓을 할 수 없을 만큼 지쳤어.
인간 세계로 데려다줄게.
폭풍우 속에서 작은 까마귀는 날개를 펼쳐 소녀를 품에 안은 채 아래로 날아내렸다.
차가운 에덴을 떠나 검은 구름을 뚫고, 따뜻한 인간 세상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천둥번개 속에서 방향을 잃게 되었고, 회색 날개는 빗물에 젖어 비행이 위태로워졌다.
이 정도면 충분해.
소녀가 힘없이 말했다.
날 바람 속에 남겨두고, 너 혼자라도 돌아가. 넌 분명 집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작은 까마귀는 여전히 소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를 안고 폭풍을 뚫고 나아가려 했지만, 지친 날개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날 수 없었던 소녀는, 그저 바람에 밀려 점점 멀어져 가는 까마귀를 바라보며, 힘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인간의 목소리가 갑자기 멈추고, 빛나던 은빛 광채가 다시 한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지휘관님...
짧은 몇 초 동안 지휘관은 깊고 광기 어린 소용돌이 속으로 내던져졌다. 기류가 빗방울을 휘감으며 귓가에서 터져나갔다.
회색 깃털이 태풍의 눈벽을 파고들었다.
모든 빛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이 다시 엄습해 왔다. 입을 열면 물살에 삼켜질 것만 같았다.
계기판 스캔, 데이터 해석, 조종, 반응 관찰… 여러 명령들이 빠르게 뇌리를 스쳐 지나갔고, 인간과 회색 깃털은 바람의 심해를 가르며 함께 나아갔다.
눈벽의 두께에도 한계는 있다. 그녀를 만나려면, 반드시 이걸 뚫고 나가야 한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 한 점이 나타나더니 점점 커져갔다.
지휘관님께서 저를 만나러 오셨으니, 저도 지휘관님을 만나러 갈 게요.
꿈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였다.
리브는 천천히 입을 열며 지휘관에게로 다가가, 남은 이야기를 함께 써 내려갔다.
소녀는 홀로 추락하며 창백한 몸으로 수많은 안개와 먹구름을 뚫고 내려갔어요.
그러다 자신의 주변에서 작은 불빛들이 천천히 피어오르는 걸 봤어요.
"너희들도 길을 잃었어?"라고 물었지만, 불빛들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부드럽게 소녀의 몸속으로 스며들었어요.
"따뜻해." 그건 소녀가 치유해 주었던 생명들이, 자신들의 천사가 떨어지는 걸 보고 내민 손길이었어요.
나무들은 하늘까지 닿을 듯한 덩굴을 뻗었고, 흰 비둘기들은 그녀의 날개가 되어주었죠. 그들은 그녀가 준 생명을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었어요.
곧이어 흐릿한 불빛이 지휘관의 시야 속에서 반짝이며, 점점 리브의 윤곽을 그려냈다.
그와 동시에, 폭풍우의 포효가 멈추고 회색빛 혼돈이 막처럼 걷혀졌다.
눈벽이 멀어지고, 태풍의 눈이 찾아왔다.
눈 부신 햇살을 마주하자, 리브의 모습이 점차 동화와 하나가 되어 가는 듯했다.
다시 힘을 얻은 신은 마침내 상처투성이가 된 작은 까마귀를 발견했다. 소녀가 멀리서 외쳤지만, 까마귀는 이미 소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소녀는 그것에게 날아가, 슬픔 어린 품으로 꼭 끌어안고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두근, 두근... 알에서 깨어나는 새처럼, 생명 가득한 심장 소리가 울렸다.
두근, 두근... 심장소리와 함께 몽환적인 은빛 깃털이 흩날렸다.
소녀는 놀란 얼굴로, "회색 까마귀"가 점점 성장해 자신이 그토록 기다려던 모습으로 변해가는 걸 지켜보았다.
나의 그레이 레이븐... 나의 사랑...
그는 울고 있는 아이에게, 고난 속을 걸었던 소녀에게, 그리고 굴곡 많았던 그 시간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그의 두 팔이 리브를 꼭 껴안았다.
이렇게 와주신 것만으로도, 저에게는 가장 큰 행운이에요.
신께 욕심을 부릴 수 없어서, 종이비행기에 제 소원을 적지 않았어요.
그저 그것들이 지휘관님 곁에 머물며, 지휘관님을 제게 데려와 주길 바랐어요.
그 소원 하나만으로도 제겐 과분한 욕심이었는데… 그걸 지휘관님이 대신 이뤄주셨어요.
저는 종이비행기들을 믿었어요. 그리고 모든 동화를 믿었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원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어쩌면 이미 알고 계셨겠지만… 만약 이것이 우리의 동화라면...
제가 조금만 더 욕심을 내도 괜찮을까요? 조금만 더 제멋대로 굴어도 괜찮을까요? 지휘관님께 제 마음을 전하고 싶어요.
사랑해요, 지휘관님.
햇살이 반짝이며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몇 번째의 반짝임인지 기억나지 않을 때쯤, 시야가 하얗게 물들며 귓가의 소음이 모두 멎었다.
입술에 깃털처럼 부드러운 감촉이 닿으며, 그녀의 입맞춤이 바람과 함께 찾아왔다.
바람결에 맺힌 이슬 때문에, 조금은 촉촉하고 서늘한 감촉이었다.
"얼마나 기다려야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나타날까요?"
어린 시절의 답을 찾아 멀리 헤매어 온 소녀는 마침내 맑은 하늘 아래에서 그 답을 얻었다.
세월의 쓴맛과 꿈속의 달콤함, 새기기 어려웠던 모든 그리움과 사랑을 하나의 입맞춤에 담아냈다.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간절했고, 시적이면서도 진실했다.
폭풍우를 뚫고, 생과 사를 건 수많은 시련을 지나, 두 영혼이 거울처럼 맑은 하늘 아래서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한참이 지나자 그녀의 입맞춤이 다시 깃털처럼 가볍게 멀어졌다.
...음, 바람이 잦아들긴 했지만, 높은 곳에 오래 있는 건 위험해요.
좀 추운 것 같은데, 돌아갈까요?
비행선이 둘을 태우고 선회했다.
기체 꼬리가 남긴 나선형의 흰 구름 자국은 마치 천사의 계단처럼 하늘로 길게 늘어졌다.
[player name]은 소녀의 손을 잡고, 피아노 건반처럼 놓인 계단 위를 걸었다.
한 계단씩, 한 걸음씩...
"그레이 레이븐"은 자신의 천사를 다시 인간 세계로 인도했다.
나의 가장 사랑하는 리브에게
<에덴의 소녀>
-THE END-
하늘은 드높고, 바다는 깊고 푸르렀다. 윈치스에서의 마지막 휴가 날, 지휘관과 리브는 부드러운 모래밭을 함께 걸었다.
베르메르 씨가 이렇게 아름다운 삽화로 이야기의 결말을 장식해 줄 줄은 몰랐어요.
날려 보내고 나면 공중 정원에 전시할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쉽긴 하네요.
리브가 품속의 종이를 펼쳤다. 몇 줄의 글자 사이로, 윈치스를 배경으로 한 리브의 그림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림 속 소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동화의 결말처럼 밝고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네. 어머니께 드릴 그림이니까요.
어머니의 이야기를 저희가 대신 마무리한 게 조금 걱정되네요. 어머니가 이 작품을 좋아하실까요?
네?
…! 맞아요. 전 이미 제 행복을 찾았어요.
소녀는 웃으며 다시 지휘관의 손을 잡았다.
둘은 결말이 적힌 종이를 비행기로 접어, 바다를 향해 날려 보냈다.
<size=38>반짝이는 바다는 어린 시절의 푸른 꿈처럼 빛났다.</size>
그는 울고 있는 아이에게, 고난 속을 걸었던 소녀에게, 그리고 굴곡 많았던 그 시간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size=38>이 이야기의 결말이 바람을 타고 저편의 안토니아에게 닿을 것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siz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