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제몽·그중 하나
>이건 아주 오래전 세계의 이야기다.
그곳의 하늘은 파랗고 높았으며, 대지는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구름 사이로 스며드는 빛줄기는 마치 신의 시선처럼, 고요히 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광활한 천지 사이엔 오직 한 명의 소녀만이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오랜 세월을 홀로 보냈다.
하루... 이틀? 1년... 2년? 시간의 흐름은 이미 희미해져 버렸다.
소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발치에는 낡은 책장들이 수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엔 삐뚤빼뚤한 글씨가 가득했고, 가장자리도, 중앙도 닳아 문드러져 있었다.
그것들은 슬픔을 머금은 채 그녀 곁을 맴돌며, 바람에 휘날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마치 갓난아기가 울음을 터뜨리는 듯이…
"울지 마..." 소녀는 조심스레 그것들을 손바닥 위에 올렸다.
그녀는 자신의 눈물로 찢어진 모서리를 붙이고, 섬세하게 종이를 접었다.
때로는 큰 나무를, 때로는 흰 비둘기를 접었다.
나무는 무성한 가지와 잎을 틔웠고, 비둘기는 자유롭게 하늘을 날았다.
소녀는 새 생명을 얻은 그것들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생명은 잠시뿐이었다. 종이를 모두 접는 순간, 그것들은 반짝이며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소녀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에덴의 소녀>
으음...
손님, 전시품과 일정 거리를 유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으... 아! 죄... 죄송해요. 잠시 딴생각을 했네요.
아... 교수님이셨군요.
거의 그림에 붙을 뻔했네, 그림에 뭐가 있어?
흠, 그래. 이 풍경, 현장 조사 장소로 딱이겠는걸.
<이원 관계에서 나타나는 긍정적 감정 표현 행동의 미시적 상호작용 연구>라는 새로운 연구 주제야.
너희 둘의 달콤한 상호작용을 관찰하는 거지. 음... 이 각도 괜찮네.
히포크라테스는 싱글벙글 웃으며 뒤로 두 발짝 물러선 뒤, 손으로 액자 모양을 만들었다. 그러자 리브와 지휘관, 그리고 그들 뒤의 그림이 손끝 안에 고스란히 담겼다.
교, 교수님!
으음...
음~ 아주 좋은 예시야. 가능하다면, 저 그림 속 장소에서 실제로 촬영해 보는 것도 좋겠는걸.
리브, 이 그림에서 뭐가 느껴져?
아... 뭔가,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르는 것 같아요.
리브는 그림에 깊이 매료된 듯했고, 이를 본 지휘관이 지나가는 전시회 직원을 붙잡았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B구역 037번... 잠시만요. 아, 안목이 좋으시네요. 이건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화가 베르미니의 작품입니다.
몽환적인 색채로 꿈같은 장면을 그려내는 데 능하시죠. 이 작품은 작가분이 직접 윈치스에서 스케치한 그림이에요.
윈치스요? …정말 제 고향을 배경으로 그린 거였네요.
리브의 고향에 같이 가보는 게 어때?
네...? 아, 저는 이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꼭 가볼 필요는 없어요.
그러면 안 돼, 리브. 내가 말했잖아? 연구 자료는 현장 촬영이 있어야 의미가 있다고. 이게 바로 현장 조사 아니겠어?
리브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휘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저... 곧 적응 훈련이 있어요...
새 기체로 바꾼 뒤에 과학 이사회에서 휴가를 내줬다고 들었는데?
의식의 바다를 안정시키거나, 네 옆에 있는 지휘관과 잘 연결해서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게 새 기체에 대한 최고의 적응 훈련 아니겠어?
으음...
두 시간 뒤면 공항에서 지상행 수송기가 출발해. 내가 이미 티켓도 예약해 뒀어. BG-3789이고, 탑승구는...
잠깐만요. 교수님. 갑자기 휴가라니요!
이게 어떻게 휴가야? 이건 <이원 관계에서 나타나는 긍정적 감정 표현 행동의 미시적 상호작용 연구>를 위한 자료 수집이야.
인류의 반격 시대 사회학 연구에 기여하는 일이란다, 리브. 넌 생명의 별의 본보기로서 진지하게 임해야지.
아... 하지만 지휘관님은...
아... 지휘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좋았어. 그럼,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어서 출발하자고!
교수는 호탕하게 웃으며 리브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리브가 망설이는 틈을 타, 두 교활한 인간은 달콤한 말로 그녀를 떠밀 듯 설득해 지상행 수송기에 태워버렸다.
목적지는 리브의 고향인 윈치스였다.
기적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지고, 파도가 굽이쳤다. 증기가 피어오르는 긴 오후, 공기는 후덥지근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비 임무용 수송기는 특정 보호구역까지만 이동할 수 있었기에, 일행은 수송기에서 내려 배를 타고 리브의 고향으로 향했다.
갑판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지휘관은, 반짝이는 수면에 비친 자신의 고민 가득한 얼굴을 마주했다.
자, 리브가 짐 정리하는 동안 몇 마디만 더 하지.
이미 다 했던 얘기지만, 새 기체로 교체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리브와의 마인드 연결을 유지해서 의식의 바다를 안정시켜야 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만큼, 링크 중에 리브 자신도 잊고 있던 기억들을 마주하게 될지도 몰라.
감정이 너무 요동치지 않게 해야 해. 안 그랬다간 꽤 고생하게 될 테니까... 아, 이걸 깜빡할 뻔했네!
연구 도구야. 연구 도구.
히포크라테스는 일방적으로 하얀 선물 박스를 지휘관의 품에 쑥 밀어 넣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걸 리브에게 전해줘. 그럼 알 거야. 몰래 열어보면 안 돼.
선물 박스를 리브에게 전해준 지 한참이 지났다. 지휘관은 지루해하며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날씨는 정말 더웠다.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자 손가락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었다. 무더운 오후, 졸음이 서서히 눈꺼풀을 눌렀다.
삐걱. 삐걱. 배가 파도에 따라 잔잔히 흔들렸다.
삐걱. 삐걱. 소녀의 발걸음 소리가 가볍게 울렸다.
미풍이 불어와 얼굴에 닿은 열기를 걷어가자... 지휘관이 천천히 눈을 떴다.
기다리셨죠? 지휘관님... 어, 어때요?
흔들리는 갑판, 흔들리는 마음. 귓가에 스친 바람의 노래가 한낮의 생생한 꿈결을 불러오는 듯했다.
지휘관님?
상대방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소녀는 걱정스러운 듯 지휘관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아!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그늘로 모셔다드릴게요. 얼음주머니는...
열기가 피어오르듯 리브의 뺨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순간,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깜빡였다.
여긴 천사 같은 건 없어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잠시 대신해 드릴게요.
리브는 작은 발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리더니, 살짝 몸을 기대어왔다.
가는 머리카락이 살랑이며 코끝을 간지럽게 스쳤고, 그 몽환적인 감각은 점점 짙어져 갔다.
자, 환자분. 좀 괜찮아지셨나요?
...정말 못 말리겠네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더위 조심하세요. 윈치스의 여름은 정말 덥거든요.
감사해요. 지휘관님.
교수님의 요구가 간혹 곤란할 때가 있기는 했다.
저도 한참 고민하다가 갈아입은 거예요. 교수님이 쪽지를 남겨두시지만 않았어도……
그게...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이 리브가 이 코팅을 입기를 간절히 원해!"라고 써 있었어요.
그, 그만 놀리세요!
그래도 예쁘긴 하네요...
그 쪽지만 아니었다면... 5분도 안 돼서 갈아입었을 거예요...
리브는 쪽지의 내용이 무척 신경 쓰였는지, 코팅을 갈아입는 걸 한참 동안 고민한 모양이었다.
너무 오래 지체됐네요.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저기 보세요. 풍차 탑이에요!
리브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높고 하얀 탑이 푸른 초원 한가운데 우뚝 서서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바람이 점점 거세지더니, 한여름의 더위가 잠시나마 씻겨 내려갔다. 두 사람은 바람의 세례를 받으며, 그 자유롭고 경쾌한 속삭임을 오랫동안 들었다.
여기가 제 고향이에요, 윈치스. 바람의 신님께서 사랑하는 해변 마을이죠.
바람은 바다의 짭짤한 내음과 해변의 갈매기 울음소리, 그리고 종이비행기 두 대를 함께 실어 왔다.
어, 이건...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발밑에 떨어진 종이비행기를 천천히 펼쳤다. 그러자 서툰 글씨체로 적힌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의 신님,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천사가 제 곁에 내려오게 해주세요."
하하하하! 천사라니, 그런 소원을 빈다고? 현실적인 걸 빌어야지!
그게 왜 비현실적이야! 그럼 넌 뭐라고 썼는데?
"바람의 신님,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만약 세상에 정말 영웅이 존재한다면, 전설의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님을 만나게 해주세요."
야. 그런 소원을 종이비행기에 적으면 바람의 신님께서 곤란해하셔.
해변가의 두 아이는 "소원"을 실은 배 한 척이 천천히 해안으로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 티격태격하며 말다툼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님이 얼마나 바쁘신데, 널 만나러 왜 와?
그래도 천사보단 낫지. 세상에 천사가 어딨...
안녕하세요... 혹시...
천, 천… 천사다…
천... 천사님... 제 소원이 이루어졌어요! 아하하하하!
잠, 잠깐, 바람의 신님께서 네 소원을 들어주셨다는 건...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님?!!
엄청난 행복감에 젖은 두 아이는 리브와 지휘관을 향해 쉴 새 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한참을 떠든 후에야 조금 진정된 표정으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종이비행기를 접는 건 이곳의 풍습 중 하나예요.
계절풍이 불 때, 종이비행기에 소원을 적어 바람에 실어 보내면, 바람의 신님께서 축복을 내려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거든요.
전설이 아니라 진짜예요!
바람의 신님께서 정말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셨어요!
알겠어요. 바람의 신님께서 두 분을 지켜주시길.
리브는 두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맞다, 천사 언니랑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님은 윈치스로 가신다고 하셨죠?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쭉 걸어가세요. 한 5분쯤 가면 입구가 보이고, 거기서 30분 정도 더 가면 윈치스예요.
남쪽이요? 북쪽에도 도로가 있지 않나요?
도로요?
아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북쪽 다리는 예전에 끊겼어요.
거긴 안 돼요. 엉망진창이라 도로라고 할 수도 없어요! 그냥 남쪽 숲으로 가세요, 그게 제일 안전해요.
길을 잃지 않게 이정표도 잘 보시고요. 만약 회색 유령을 만나게 되면 빨리 도망치셔야 해요!
네. 그 회색 유령, 이상한 새처럼 생겼어요! 게다가 주변에 철 덩어리 같은 것들이 지키고 있는데, 말 안 듣는 아이들을 잡아먹는대요.
지휘관님은 어른이시잖아. 잡아먹히지 않으실 거야!
아무튼 안전에 유의하세요. 바람의 신님께서 두 분을 지켜주시길.
리브와 지휘관은 두 아이와 작별 인사를 한 뒤 다시 길을 나섰다.
회색... 유령?
윈치스로 향하는 길 위에서, 리브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중얼거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