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생각 해 본 적 있어? 현재의 삶은 꿈일 뿐이고, 꿈이 바로 현실이라는 생각.
눈을 뜨니 차가운 바람과 설원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무런 변화 없는 풍경 속에서 7일 동안 걸으니 인간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우연히 눈 아래에 있는 단단한 물체에 부딪혔고, 흐린 하늘의 빛을 통해 군대 방호복을 입은 시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이미 얼어붙은 상대방의 목을 만지며 닳은 명패를 떼어냈다.
명패 위에 얼룩진 피를 닦아내고 보니, 그곳에 새겨져 있는 이름은……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 [player name]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 베개는 이미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문 앞에서 분주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한 분홍색 그림자가 문을 밀치고 들어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 지휘관님…… 악몽 꾸신 거예요?
리브가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아줬다.
무슨 꿈을 꾸신 거예요?
…………
괜찮아요. 악몽은 이제 끝났어요.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서야 이 낯선 방이 눈에 들어왔다.
네? 지휘관님 아직 잠이 덜 깨신 것 같네요. 여긴 우리 네 명의 집이잖아요.
루시아, 리…… 그리고 저와 지휘관님의 집이요.
5년 전, 퍼니싱으로 인한 재난이 끝났고 우리는 지금 지구의 서부 작은 마을에서 재건 작업을 돕고 있잖아요.
머릿속에서 기억을 떠올려봐도 안갯속에서 꽃을 찾는 것처럼 희미한 영상만 남아 있었다.
음…… 머리의 상처 때문일 거예요.
다 나았지만, 그날 이후로 지휘관님의 기억이 희미해진 것 같아요.
그녀는 손으로 머리에 상처 입었던 곳을 살짝 만졌다. 흉터는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리브는 그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제가 한번 볼게요.
소녀는 두 눈을 감고 보조형 기체에 내장된 진료 장치로 기초 검사를 진행했다.
음…… 요즘 너무 피곤해서 그런 것 같아요.
이전 재건 작업도 지휘관님이 많이 도와주셨으니까요.
그런 결론이 나오자 그녀는 여전히 안심하지 못한 듯 내 얼굴을 들어 자세히 살펴보면서 가느다란 손끝으로 볼의 피부를 어루만졌다.
저녁에 다시 한번 검사할게요. 그러니 오늘은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
네, 어제 모두와 약속하셨잖아요. 새로 지은 놀이공원 가기로요.
리브는 망설이다가 두 손을 내려놓고는 옷장에서 접은 옷들을 꺼내 침대 모서리에 놓았다.
벌써 오전 10시에요. 우리 11시에 출발하기로 했잖아요. 지휘관님.
옷 갈아입는 거 도와드릴까요?
네, 아침 식사도 준비해 놨어요. 루시아와 리는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저도 아래층에서 기다릴게요.
그녀는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갔다.
뭔가 석연치 않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봐도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퍼니싱으로 인한 재난이 5년 전에 끝난 뒤 그레이 레이븐 소대와 재건 작업에 참여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저 ‘어렴풋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타인의 기억을 보는 듯 낯설었다.
어쩌면 정말 리브가 한 말처럼, 그 악몽이 너무 현실적이고 길어서 지금의 기억이 이렇게 희미한 걸까?
——지휘관님!
아래층에서 리브의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잘 주무실 줄 알았으면 반즈와 함께 방을 사용하시도록 했을 거예요.
…………
갔더니 다른 리더가 일어나라고 재촉하고 있었어요.
리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루시아가 옆방에서 나오며 그의 말을 끊었다.
지휘관님,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 아침도 리브가 만들었어요. 저와 리는 조금 도와줬을 뿐이고요.
늦잠 잔 누구와 다르게 말이에요.
이제 그만하세요. 리…… 지휘관님이 아침에 악몽을 꿔서 늦게 일어나게 된 거예요.
악몽이요?
이 꿈은 게슈탈트의 추단과 좀 비슷해요.
그러고 보니…… 저도 들은 것 같아요.
당시 게슈탈트는 우리가 재난과 전쟁을 무사히 끝낼 확률이 0.031%에 불과하다고 했어요.
결국 그런 지저분한 방법을 사용하게 됐어요.
네, 그날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린 모두 넘을 수 없는 추운 겨울에 희생되었을 거예요.
반복적으로 ‘기적’이라는 두 글자를 읽으면서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 그건 숫자와 매칭되는 인간 또는 구조체와 함께 연동되어 있었는데, 분명 그중 나 자신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희미한 기억 속에서 하산이 평화 연설에서 한 말이 기억났다. ‘이곳에 서 있는 모든 생존자는 기적의 아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그곳에 서 있었나?
하지만 이제 걱정할 일은 없어요.
재건 작업만 남았을 뿐이죠.
네, 이제 5년밖에 안 됐지만 기계가 다시 가동돼서 돕게 된 뒤로 도시 건설도 빨라졌어요.
그녀들이 이야기를 나눌 때 침실을 바라보니 햇빛이 나뭇잎을 뚫고 창가에 비치고 있었다.
작은 새 몇 마리는 날개를 퍼덕이며 나무 꼭대기로 날아올라 나무 그림자 속에서 간드러진 노래를 불렀다.
이 모든 것이 오랫동안 평화를 바라고 있었음을 보여줬다.
지휘관님, 음식이 입에 안 맞으세요?
인간의 넋이 나간 눈빛을 알아챈 리브는 손을 흔들었고, 잠시 후 내 앞에 섰다.
멍하니 계신 것 같은데.
……지휘관님……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가 아닐까? 전역한 많은 지휘관들이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고 들인 적이 있어.
심리 쪽 진료는 제가 잘 못해서요. 지휘관님, 오늘 일정이 끝나면 저랑 같이 병원 가요.
아무래도 가는 게 좋겠어요.
네.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아침을 먹는 거예요.
그녀는 국물이 가득 담긴 숟가락을 들어 내 앞으로 내밀었다.
드셔보세요. 이건 지휘관님이 알려주신 레시피를 보고 새로 만든 거예요.
숟가락에 담긴 따뜻한 국물을 삼키니 소녀의 미소와 같은 달콤한 맛이 났다.
기나긴 전투와 싸움이 끝나기 전에 모든 군인은 무의식적으로 이런 평화로운 미래를 찾고 있었다.
오늘날, 악몽에 시달리던 그들은 이 긴 꿈에서 깨어나 이상적인 고향으로 왔다.
……그럼, 이제 더 이상 불안과 의심으로 이 평화를 깰 필요……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