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를 찌르는 매서운 바람이 황폐한 설원에서 기승을 부렸다.
약탈당한 보육 구역은 매우 처참했다. 폐허엔 회색 구호 텐트가 있었으며, 황폐한 거리엔 억눌린 울음소리가 녹내 나는 바람을 타고 울려 퍼졌다.
루시아는 심문을 받고 있어, 군은 여러 방면을 고려해 지휘관은 한동안 그레이 레이븐을 떠나 행동해야 했다.
지휘관은 겨울 계획의 기밀 자료를 회수하라는 긴급 임무를 받았다. 그러자 니콜라는 마침 근처에서 주둔하고 있는 멘티스 소대의 대원들을 지휘관에게 배정시켜 줬고, 최대한 빨리 그 기밀 자료를 회수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지휘 센터가 계산한 가장 효과적인 안배였다.
지휘관은 파견을 받자마자 멘티스 소대를 이끌고 출발했지만, 그럼에도 한발 늦었다.
무장 폭도들은 이 보육 구역을 약탈했을뿐더러, 보육 구역 내의 여과탑마저 파괴해 버렸다.
이중합 탑의 주위는 안전 구역이었지만, 범위가 제한돼 지표면을 모두 뒤덮을 수 없었다.
이중합 탑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보육 구역은 여과탑의 보호를 받아야, 겨우 대지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공기 중의 퍼니싱 농도가 점점 짙어진다면...
지휘관님, 여과탑의 검사를 완료했어요. 원심 분리기 어레이의 부품이 심하게 파손돼, 당장은 복원할 수 없어요.
저희도 이렇게까지 파손될 줄 몰랐어요. 심지어 여과탑 점검 담당 기술자는 필터가 이렇게까지 되지 않도록...
저희가 결국 한발 늦었네요.
단순한 자료 회수 임무였던 만큼, 상황이 이렇게 복잡해질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원래 이 보육 구역에서 생활하던 주민들은...
여과탑이 재가동되지 않는다면, 이곳의 생존 조건은 매 순간마다 더 혹독해질 거였다.
어디서 온 건지 모를 하얀 페르시안 고양이가 지휘관을 태연하게 따라다녔다. 크로와는 발걸음을 보채, 고양이를 피하고는 단말기를 확인하며 보고를 이어갔다.
일할 수 있는 보육 구역의 인원에게 부탁해서 통계해 봤어요. 면역 혈청과 월동 물자는 상당히 부족하고, 많은 이들에게 가벼운 침식 증상이 나타났어요.
저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체할 부품이 도착할 때까진 시간이 더 필요했고, 심지어는 수리 조건마저도 아주 까다로웠다.
약 230km인데요, 수리하고도 사용할 수 있는 대형 운송 장비는 한 대뿐이고, 가는 길에 다른 돌발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노인과 아이를 우선적으로 일부 물자와 함께 운송 장비에 태워, 다른 보육 구역으로 보냈다. 지휘관은 이번 임무에서 자신과 멘티스 소대를 두 팀으로 나눠, 한 팀은 노인 그리고 아이와 함께 먼저 떠나게 했다. 다른 한 팀은 지휘관과 함께 다른 주민을 호송하며, 무장 폭도의 흔적을 추적했다.
보육 구역의 주민에게 이해관계를 명확히 설명하자, 주민 대부분은 기꺼이 협력했다. 선발 소대는 빠르게 집합하고는 출발했고, 후속 소대의 주민들도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기다리던 그때, 지휘관은 자신도 모르게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설원의 밤은 뼈를 찌르는 듯이 추웠다.
소식을 들었다는 듯이 연이어 몰려오는 침식체를 소탕했다. 설원의 혹독한 전투 환경과 아직 합을 맞추고 있는 작전 방식으로 인해, 반복되는 전투 속에서 피로가 나날이 쌓여가고 있었다. 결국 이 전투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모두가 어느 정도 부상을 입었다.
부상자를 안정시키고, 크로와와 다음 계획을 세우던 그때, 갑자기 마인드 표식에 알 수 없는 과부하가 일어났다.
지휘관님? [player name] 지휘관님?
미세한 전류 소리와 함께, 낯설고도 익숙한 소리가 머리에 들려왔다.
[player name]?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설원에서 걸어 나오는 하얀 그림자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목소린... 설마?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 기억력이 좋네.
왜? 내가 나오면 안 되는 거였어?
공중 정원이 또 무슨 일을 저질렀길래, 당신 같은 "귀한 비장 카드"를 꺼낸 거지?
넌 공중 정원에서 기술자가 승격자의 최신 정보를 캐낼 때까지 한가롭게 차나 마시는 거 아녔어?
내게서 뭘 더 알고 싶은 건데? 말해봐, 알려줄지도 모르잖아.
공중 정원이 멍청하게 지휘관을 승격자와 몰래 만나게 해줬다는 거야?
쳇...
거센 바람이 불어오자, 텐트 옆의 감지 기기가 휘청거렸고, 지휘관은 급히 손을 뻗어 이를 잡았다.
지상에 있는 거야?
알파는 지휘관과 강제로 연결할 수 있었지만, 지휘관의 구체적인 위치는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금 전의 동작이나 바람 소리로 정보가 유출된 것 같았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작은 전류 소리와 함께 알파의 냉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어리석은 쥐들을 사냥하고 있지.
이번엔 네가 대답할 차례야. 이번엔 내려와서 또 뭘 상대하려는 거야? 적조? 승격자? 이합 생물?
지휘관은 잠시 고민하다, 알파의 질문에 애매모호하게 답했다.
흥.
알파는 코웃음을 쳤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 침묵에 빠졌다.
그래?
잠깐의 대치 후, 알파가 일방적으로 신호의 연결을 끊었다.
알파의 의도는 뭐였을까? 그들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걸까?
알파는 지휘관이 지상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지휘관은 겨울 계획의 기밀 자료를 찾던 중 연결된 것이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지휘관님, 무슨 일이 있었나요?
승격자요?!
크로와에게 경과를 간단히 설명했다.
강제로 연결했다고요? 승격자가 그런 것까지 할 수 있다니.
그럼, 지금 엄청 위험하다는 거잖아요?!
이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알파로부터 겨울 계획이나 승격자에 대한 다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심지어 이를 통해 알파의 정확한 위치까지 알아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휘관은 수시로 연결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섣불리 출격하거나 계획을 바꾸면 알파는 분명 눈치챌 것이었다.
지휘관은 사전에 임무 브리핑을 완료해, 승격자의 정보와 함께 공중 정원에게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중 정원으로부터 답변이 왔다.
"접수 완료. 즉시 증원을 보내겠다."
"행동 주의 요망. 통신 유지 및 지속적인 보고 바람."
이젠 알파의 두 번째 연락을 기다리기만 하면 됐으며, 그전까진 임무를 계속해야 했다.
지휘관은 무장 폭도들의 노선을 다시 확인한 후, 보육 구역의 주민들을 데리고 긴 여정을 떠났다.
지휘관은 그치지 않는 설원의 바람 소리를 듣자, 알파의 채널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들렸던 게 떠올랐다.
거칠게 부는 바람의 소리가 채널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는 다소 정신없으면서도, 의외로 듣는 이를 차분하게 만들었다.
차디찬 바람이 하늘에 구멍이라도 낸 듯,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