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재"
>영상 촬영 버튼이 이건가? 아, 이미 시작됐네.
카메라 앞의 남자는 천천히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그는 입고 있던 흰 가운을 잡아당겨, 마치 수의처럼 여윈 몸을 꽁꽁 감쌌다.
내 이름은 토마스·헬... 앞으로 난... 크흠...
토마스 헬은 흥분 탓에 목소리가 격앙된 걸 자각하고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입술을 한번 핥은 뒤, 책 위에 놓인 물잔을 집어 단숨에 들이켰다.
앞으로 이 영상 기록으로 실험 일지를 남길 생각이다.
그럼...
실험 일지 [A-0001].
토마스는 카메라 가까이 다가갔다. 광각 렌즈 탓에 그의 얼굴은 살짝 일그러졌고, 픽셀로 표현된 눈동자엔 흥분이 번져 있었다.
실험자: 토마스·헬
나는...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군...
이건 정말 중요한 기회야. 최선을 다해… 아니, 반드시 해내야만 해.
토마스·헬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놓인 원통형 유리 구조물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거치대 위에 놓인 건 돌덩이처럼 보이는 작은 파편.
하지만 토마스는 그 안에 무한한 가능성이 깃들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파편의 출처는...
이중합 탑...
내가... 모든 걸 바꿔 놓을 거야.
그의 목소리는 마치 기도문을 읊는 사람처럼 단호하고 경건했다.
녹화 시작. 이제 실험 일지에 대해 이야기해야겠어.
토마스·헬은 의자에 앉아 한 바퀴 회전한 뒤,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는 좀 더 체계적으로 기록을 남기는 게 좋겠어. 선생님도 항상 모든 일에 진지하게 임하라고 말씀하셨지. 크흠, 어쨌든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실험 일지 [A-0014].
실험자: 토마스·헬
14번째 실험이 끝났고, 큰 진전은 없지만, 이 정도는 예상한 범위 내야.
지금은 그저 새벽 직전의 어둠일 뿐, 곧 빛이 찾아올 거라 믿어.
실험 일지 [B-5042].
실험자: 토마스·헬
실험에 진전이 없어.
…………
그는 덥수룩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더는 시간을 낭비해선 안 돼,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실험 일지 [C-0251].
실험자: 토마스·헬
토마스·헬은 그대로 의자에 앉은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방 안의 공기를 점점 더 무겁게 만들었고, 그는 마치 그 공기에 질식해 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또 실패했어…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
토마스·헬은 다시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윽고, 그는 책상 위 실험 데이터를 꺼내 들었다. 수없이 확인했던 것들이었지만, 다시 처음부터 검토할 생각이다.
기브스 변수... 효율... 전환 결과... Zhang’s Method...
이해가 안 돼.
공식을 역산한 수치대로 실험했는데, 왜 원하는 결과가 안 나오지 거지?
혹시 공식이 틀렸나?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이게 아니야... 뭔가 잘못됐어... 전부 다 틀렸다고!
토마스·헬은 종이 더미를 바닥에 내던지고,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듯 헝클어뜨렸다.
이중합 탑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존재야. 낡은 이론을 맹신해선 안 돼.
선현들? 결국엔 그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어!
도미니카도 마찬가지라고!!!
새로운 공식을 찾아내야 해.
시간은... 결국 내 편이 되어줄 거야.
이러한 결론에 다다른 그는 천천히 일어나 카메라를 껐다.
실험 일지 [C-1564].
실험자: 토마스·헬
또 실패했어.
카메라가 잠깐 켜졌다가 다시 꺼졌다.
실험 일지 [C-1677].
실패.
실험 일지 [C-1754].
실패.
실험 일지 [C-2065].
실패.
실험 일지 [C-2480].
실패.
<size=35>실패...</size>
<size=40>실패 실패...</size>
<size=50>실패 실패 실패...</size>
<size=60>실패 실패 실패 실패...</size>
실험 일지 [E-0032].
실험자... 하아, 이런 실험을 계속하는 미치광이는 아마 나뿐이겠지.
토마스·헬은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아이디어가 떠올랐어...
상당히 위험할 것 같지만... 시도는 해봐야지.
선생님께서 이걸 아시게 되면 아마 엄청 화내실거야…
하지만 나 같은 쓸모없는 놈은 이런 방법을 쓸 수밖에 없어…
토마스·헬의 기억은 아득한 과거로 흘러갔다.
그 당시의 토마스·헬은 지금처럼 전문가의 흰 가운을 입은 모습이 아닌, 풋풋한 교복 차림이었다.
어느 한가로운 오후, 조용한 학교 건물 안. 그는 자료를 품에 안고 조심스레 사무실 문을 열었다.
토마스·헬은 교직원들이 아직 업무 중인지 알지 못했기에, 초조함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방 안에는 그의 선생님인 발렌티나가 넓은 책상 앞에 앉아,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자, 사진 속엔 네 명이 함께 찍힌 모습이 담겨 있었다. 토마스는 그중 발렌티나와 슈바르츠실트만 알아볼 수 있었다.
다른 둘은 온화한 인상의 중년 남성과 젊은 구룡인이었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바라보던 그는, 설명할 수 없는 거리감에 말을 걸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이윽고 발렌티나가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먼저 입을 열었다.
궁금해?
네?
잠시 멍하니 있던 그는, 선생님의 질문이 사진 속 사람들을 두고 한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저분들은... 누구신가요?
이 세계를 바꾼 사람들이야.
그들과 비교하면, 나를 포함한 대부분은... 그냥 보잘것없는 인간일 뿐이야.
선생님, 너무 겸손하신 말씀입니다. 과학 이사회의 부장님께서 어떻게 보잘것없는 분일 수 있겠습니까.
그의 말에 발렌티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저었다. 그러나 그 어투에는 어딘가 모를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왜 아니겠니…
머리를 격하게 흔들며 기억을 떨쳐낸 토마스는, 바닥에 널브러진 서류들을 보는 게 괴로운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요, 선생님…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토마스·헬은 그제서야 선생님이 말한 "보잘것없는 존재"의 의미를—
그리고, 그런 존재로 살아가는 고통을 이해한 것 같았다.
빨간 경보등이 실험실 전체를 물들이며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울렸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토마스·헬도 그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기억을 더듬으려 했지만, 머리를 짓누르는 통증이 생각의 흐름을 끊어버렸다.
의식이 흐려진 가운데, 몇 조각의 단편적인 기억만이 떠올랐다.
이내 거울이 깨지듯 공간이 부서졌고, 폭발음과 함께 섬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흐흐, 인간...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귓가를 스치는 강한 바람. 그제야 남자는 자신이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본능적으로 먼저 움직였다.
그 순간, 그의 몸에서 붉은 입자들이 분출되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휘감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붉은 악마의 형상으로 변모한 남자는,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가르며 착지했다.
쾅.
착지와 함께 먼지가 피어오르고, 붉은 악마는 곧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붉은 코트를 입은 백발의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폐허뿐이었다.
여긴 또 어디야?
지상의 어느 한 폐허.
초록색 문양이 수놓아진 어두운 남색 코트를 입은 백발의 남자도 폐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붉은빛을 띤 기계체 하나가 그를 향해 다가오는 중이었다.
지면에 떨어지면서 침식체들의 주의를 끈 것이었다.
흠... 흥미롭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