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메인 스토리 / 34 꿈속 시간의 끝으로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34-1 헛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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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상한 “전쟁 후유증” 이후로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지휘관은 소대원들의 안위를 지나치게 걱정한 탓에 ‘생명의 별’ 검사과를 자주 들락날락했고, 이 일화는 이내 부대 안팎으로 퍼져나가, 가끔 다른 동료들과 마주칠 때면 농담거리가 되곤 했다.

모든 것이 일상으로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많은 이들은 이를 ‘지구 탈환’이라는 거대한 목표가 본궤도에 오른 신호라 여겼다. 이것은 분명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분명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지휘관의 마음속 한편에는 이름 붙이기 어려운, 어딘가 불협화음처럼 느껴지는 감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평범한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처럼 말이다.

명백한 과로 증상입니다. 검사 결과로 봐선 다른 이상은 없네요. 약은 따로 처방해 드리지 않을 테니, 가능한 한 푹 쉬세요. 휴식이 가장 좋은 약입니다.

생명의 별 의사는 검진 결과가 담긴 화면을 넘기며 차분하게 안심시켰다.

지휘관은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그늘진 여운을 뒤로한 채, 의사의 조언에 짧게 대답했다.

검사 결과가 나온 뒤, 이를 들은 지인들로부터 안부 인사가 이어졌고, 곧 만나자는 요청도 연달아 들어왔다.

오랜만에 임무에 쫓기지 않고 오후까지 자다가 깨어난 지휘관은 눈을 뜬 뒤 한동안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냈다.

달력과 메모를 펼치자, 동그라미로 표시된 날짜 아래 아이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예술 협회 오페라 극장

공중 정원

8:30

악보 너비: 0

예술 협회 오페라 극장, 공중 정원, 8:30, 악보 너비: 0.

웅장한 돔과 장엄해 보이는 조각물로 우아하게 장식된 오페라 극장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본관 옆문에는 황금시대 전후로 꾸준히 사랑받아 온 고전 오페라 <에우리디케>, <오르페오>, <포페아의 대관식> 등 최근 공연한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오늘 밤의 공연 <그레이 레이븐의 전설>도 그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극장 안에는 리드미컬한 멜로디와 노랫말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눈부신 선홍빛과 그림자가 드리우자, 악의가 군침 흘리네."

"자욱한 화약 연기, 드문드문 들리는 총성과 함께 방어선이 위태롭구나."

노래가 이어질수록, 무대 위 배우들의 움직임은 다소 지나치다고 느껴질 정도로 점점 과장되어 갔다.

지휘관이 넋을 놓고 있던 그때, 어깨로 미세한 진동이 전해졌다.

옆자리에 앉아 살짝 몸을 기울인 아이라가 무대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낮게 속삭였다.

이제 곧 "네"가 등장해.

내가 특별히 소품 담당자와 연출한테 부탁해서 "너"를 좀 더 돋보이게 만들어 달라고 했어.

지휘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명이 갑자기 움직이며 겹치더니, 그림자 속 한 배우를 비추었다.

두려워 마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 그레이 레이븐이 있습니다.

적을 무찌르고, 동료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멈추지 않을 거예요.

무대 위 "지휘관"의 춤사위를 중심으로 모든 배역이 움직이자, 무대가 역동적으로 펼쳐지며 극은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짧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동시에, 어딘가 어긋난 기억과 묘한 감정이 뒤섞여 올라왔다.

사실 그 장면들에서의 세세한 부분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함께 했던 이들의 얼굴만은 또렷했다.

어때, 괜찮지?

익숙한 분장과,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무대에서 퇴장하자, 지휘관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격정적인 장면이 끝난 뒤, "지휘관"이라 불리는 배역 옆에는 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조명 아래 서서, 관객을 향해—아니, 어쩌면 그 뒤에 있는 사랑하는 이를 향해—자신의 마음을 토로하고 있었다.

여배우

시간이여...

여배우가 입을 뗀 순간, 주위의 소음이 마치 베일 너머로 스며들 듯 희미해졌다. 소리는 점점 멀어졌고, 무대는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여배우의 부드럽고 긴 노랫말이 이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뒤틀리고, 일그러졌다. 처음엔 귀를 긁는 듯한 불협화음이었다가, 어느 순간 매끄럽고 선명하게 모이더니—

낯설지만 맑고, 진심이 고스란히 담긴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

비바람이 아무리 몰아친대도...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입술이 굳어졌고, 뭔가를 놓쳐버린 듯한 떨림이 온몸을 스쳐 지나가며, 묘한 불안감이 마음 깊숙이 번져왔다.

정신을 차렸을 땐, 주인공이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거리 탓에 얼굴은 흐릿했지만, 그 청아한 목소리만큼은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이 공간에는 단둘만 남은 것 같았다.

그녀가 지휘관 쪽을 바라보았다.

???

제가 사랑하는 이는, 이 시 속에서 영원한 젊음을 간직할 거예요.

아이라

<size=25>[player name]?</size>

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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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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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끊기면서 고개가 강제로 돌아갔다. 그 시선 끝에 보인 건, 걱정스러운 표정의 아이라였다.

괜찮아? 갑자기 왜 그래? 얼굴색이 안 좋아 보여.

혹시 불편하면, 먼저 나갈까?

아이라를 잡은 손이 천천히 내려왔다.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인 지휘관은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여배우

아~ 사랑하는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님, 저는 당신과 함께...

공연에는 급작스러운 전환이나 예상치 못한 변화 같은 건 없었다. 무대 위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었고, 조금 전의 기이한 순간은 마치 착각처럼 느껴졌다.

오페라 극장을 나서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덕분에 어지럽던 머릿속이 조금은 맑아지는 듯했다.

관람 중에 보았던 환영은 서서히 망막에서 지워지고 있었지만, 그 자리를 메운 풍경은 왠지 모르게 허전했다.

의사의 조언대로 휴식을 취해도, 감정 속 불협화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공허 속에 앉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

낮게 한숨을 내쉬자, 피로감이 몰려왔다.

입구 계단에서 발걸음을 멈춘 지휘관은 콧등을 꾹꾹 누르며 천천히 자리에 앉은 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 따뜻할 때 마셔.

음료를 받아 든 지휘관이 옆으로 살짝 비켜 자리를 내어주자, 아이라가 자연스럽게 앉았다.

미안. 대본이 너무 형편없어서 대사가 어색했지?

협회에 그레이 레이븐 소대 팬인 작가들이 몇 있거든. 너희 활약상을 쓰고 싶어 하긴 하는데, 제약도 많고 기밀 조항도 심해서 말이지.

어머! 그 두 문장은 유명한 작가님의 쓴 거라고!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라는 가볍게 몇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바람을 따라 몸을 돌리듯 움직이며, 마지막에 오른손을 부드럽게 앞으로 뻗었다.

시간이여, 비바람이 아무리 몰아친대도...

제가 사랑하는 이는, 이 시 속에서 영원한 젊음을 간직할 거예요.

지휘관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이라는 즉흥 연기를 멈추고 그 자리에 서서 눈썹을 찌푸리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난 괜찮아, 지휘관. 방금...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어…

하하… 그건 뭔가 위험한 배경이 깔린 대사 같은데?

지휘관의 즉흥적인 대답에 아이라는 스쳐 지나간 의심을 털어내고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몸을 한껏 젖힌 아이라는 두 손으로 카메라 프레임 만들고 한쪽 눈을 감았다.

이 장면도 괜찮은데? [player name] 너만 괜찮다면, 내 모델 해보는 건 어때?

음… 매달 무료로 뮤지컬이랑 전시회 티켓 대량 제공! 어때?

아이, 좀 도와줘. 뮤지컬이랑 전시회가 재미없어? 오늘 공연에서 감동 포인트 하나도 없었단 말이야?

아이라의 한마디는 일상 속에서 묻혀가던 불편한 감정을 되살려냈다. 뒤돌아보자 그 이상한 느낌은 손을 흔들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방금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장면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인식이 흐릿해지면서, 머릿속에는 희미한 의문만이 남아 있었다.

음? 그 배우가 마음에 들었어? 아니면… 시 낭독하는 연기가 좋았던 거야? 원하면 사인받아다 줄 수도 있어.

아~ 그 배우가 연기한 건 가상의 인물이고 실제 모델은 없어.

극 중에선 영웅인 주인공과 함께 싸울 전우가 필요하잖아.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

헤... 제작진들이 나한테 자문을 구하긴 했어. 혹시라도 네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걱정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말했지. 특정하지 않으면 괜찮을 거라고. [player name], 너라면 그런 캐릭터가 나오는 걸로 기분 나빠하진 않을 테니까.

아이라가 눈을 깜박이며 웃자, 짙게 깔려 있던 우울한 기운도 한결 옅어졌다.

아쉽다. 사실 이번엔 다른 공연을 보여주고 싶었어. 모종의 이유로 한동안 공연이 무기한 중단됐던 작품이거든.

재공연 허가 소식을 들었을 땐 이미 연습이 한창이었는데, 공연 일정이 네 휴가랑 맞추기가 어렵더라.

그럴 리가! 물론 전쟁 장면이 많이 나오긴 하지만, 이건 뮤지컬이지. 서커스도 아니고.

제목이...

<i><b><아카디아 대철수>야.</b></i>

목을 가다듬은 아이라가 말투를 조금 바꾸며 연기하듯이 말을 이어갔다.

<i>아, 피여. 아, 무기여.</i>

<i>우리는 정말 잘 싸웠다. 용감무쌍한 동료들이여! 하지만, 이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침식체들이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있다.</i>

<i>일어나라. 일어나라. 우리는 뒤에 있는 보금자리를 지켜내야 한다.</i>

<i>일어나라. 일어나라. 이 보금자리는 결국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다. 땅의 먼지가 우리의 보금자리를 붙잡게 놔둘 텐가?</i>

걱정 마. 이런 주제의 시나리오는 심사도 굉장히 까다로워.

전쟁과 고난은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주제라는 걸 예술 협회도 잘 알고 있어. 무엇보다 명예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건 절대 용납되지 않거든. 그런 점에선 항상 신중했지.

공연이 중단되기 전까지만 해도 <아카디아 대철수>에 대한 평가는 정말 좋았어.

작가가 아카디아 대철수라는 사건을 나름의 시각으로 섬세하게 구성했고, 기발한 연출도 많았지.

실제 일어난 일과 차이가 있을 순 있지만, 이야기 자체는 훌륭했어.

지휘관의 질문에 아이라는 잠시 말문이 막혀, 뭔가를 말하려다 멈칫했다.

기...

기억이 안 나...?

하... 나도 모르겠어.

웃으며 눈살을 찌푸리던 아이라는 결국 어깨를 으쓱이고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은... 아니.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니 중요한 이유는 아니었나 봐.

그래서 "알고 있다."는 인상만 남아있고,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 것 같아.

아이라가 말하며 뒤를 돌아봤다.

아이라를 따라 돌아보니, 오페라 극장 입구에 걸린 여러 포스터 중, <아카디아 대철수>가 눈에 띄었다.

포스터에는 한 소녀가 등을 돌린 채 폐허 속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지휘관은 멀리서 그 포스터를 바라보다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베스 연구소

8:30

미지의 구역

악보 너비: 1

아베스 연구소, 8:30, 미지의 구역, 악보 너비: 1.

이리스.

네가 아직 살아있어서 정말 기뻐.

차가운 목소리가 잔해 속에서 울려 퍼졌다.

으... 으으... 윽...

폐허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돌무더기에 파묻혀 있었다. 그 모습은 실로 처참했다.

소리가 흐릿한 의식을 자극하자, 이리스는 폐허 속에서 몸을 움직이려 애썼다.

이리스는 일어나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 갑옷 파편들 사이에는 한 장치가 놓여 있었다.

후... 아...

이리스가 낮게 읊조리자, 멈춰 있던 시스템이 다시 가동되며, 손상된 기체 구조가 간신히 작동을 이어갔다.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다니, 만약 나였다면 온 힘을 다해 대답했을 거야.

긴 대치 끝에, 드디어 첫 결과가 나왔네. 그동안 날 수없이 막아섰겠지... 하지만 이번엔 내가 한발 빨랐어.

<color=#ff4e4eff>아베스</color>의 첫 막은 이제 끝났어.

장치 속 목소리엔 적의가 깃들어 있었지만, 참 모순적이게 간절함도 함께 담겨 있었다.

이쯤에서 그만둬. 더 이상 너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계속해 봤자 우리 둘 모두에게 시간 낭비일 뿐이야.

공연은 결국 상연되었고,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어.

난 수없이 시도할 수 있지만... 넌 단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걸 잃게 될 거야. 이 연구소처럼 말이지.

이리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폐허 사이로 피로 얼룩진 의복이 희미하게 보였고, 지친 목소리에는 슬픔이 배어 있었다.

… 맞아요. 매번 앞서가는 건 불가능해요.

이리스는 멈추지 않고 오히려 발성 장치를 향해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수록 발걸음은 점점 더 단단해졌다.

지금 어떤 상황인지 본인도 잘 알 텐데. 왜 계속 고집을 부리는 거지?

자신을 의미 없이 소모하다 희생하는 그런 선택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그게 아니라면... 더 큰 전투로 번져서 내 계획에 없던 존재들까지 끌어들이고 싶은 건가?

그럴 리가요, 후아. 아베스는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 거예요.

이리스가 발성 장치 옆에 다가가 가슴에 있는 코어에 손을 얹고 살짝 문지르자, 짙푸른 빛이 솟구쳐 올랐다.

그 빛은 선이 되어 허공에 규칙적인 형상을 그려냈다. 잠시 후 빛은 사라지고, 그곳에는 악기 한 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리스는 아무렇지 않게 폐허 위에 앉았고, 곧이어 음악이 울려 퍼졌다.

소용없어. 네가 뭘 믿든 결국 모든 건—

쟁...

공간을 찢을 듯한 불협화음이 울리더니, 이리스를 중심으로 한 변이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속도는 너무나 빨라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장치의 반대편까지 닿는 듯했다.

?!!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놀라움이 섞인 외침에, 이리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천천히 숨을 고른 뒤 고개를 들어 말을 이었다.

저와 지휘자님이 아무리 노력해서 당신을 막는다 해도, 전투의 여파로 생기는 피해를 완전히 막진 못해요.

하지만 무대를 바꿔보면 어떨까요? 이 세계와 격리된 무대라면... 당신이 아무리 격렬한 연극을 펼쳐도, 관객은 다치지 않겠죠.

그건 불가능해! 내 본체조차 잡지 못한 네가 어떻게 그걸?!

장치 속 목소리가 멈칫하는 걸 보니, 상대도 문제를 깨달은 듯했다.

맞아요. 전에는 당신을 찾는 게 힘들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당신이 아베스 연구소를 파괴했을 때, 모든 흐름이 변했어요. 세계는 상처를 입었고... 전, 당신을 기억하게 됐어요.

미친 건가? 혼자서 무슨...

제 새로운 작품을 보여드릴게요. 이제 남은 공연에는 저와 당신뿐이에요.

이리스는 이노이·후아의 낮은 으르렁거림을 가로막으며 선언하듯 말했다. 그 순간 음표가 퍼지면서 무언가가 바뀌기 시작했다.

이리스는 고개를 들어 폐허 사이로 비치는 달을 바라봤다.

음표가 닿는 순간, 하늘과 달빛이 잠시 멈춘 듯 고요해졌고, 마치 세계가 그녀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니?

이리스는 눈을 내리깔며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꽃도 자기 마음속 그 이를 위해 비바람을 막아주고 싶어 하죠. <M>그</M><W>그녀</W>가 많이 지쳐 있어요.

무대 뒤에서 끝낼 수 있는 이야기를 굳이 앞으로 꺼낼 필요는 없어요. 결말은 이미 정해졌으니까요.

아베스 연구소

8:50

미지의 구역

악보 너비: 1

아베스 연구소

8:50

미지의 구역

악보 너비: 2

세상에 평안한 밤이 깃들길.

지휘자님께 안녕이 깃들길.

"다음에 봐."

지휘관은 단체 채팅방에 그 한마디를 남기고 단말기를 옆에 내려두었다.

아이라와 헤어진 뒤, 다른 동료들과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밤이 늦어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책상 위엔 동료들이 준 선물들과, 참석하지 못한 이들을 대신해 전달된 몇 가지 선물도 함께 놓여 있었다.

지휘관은 선물과 함께 온 편지들을 하나씩 읽어나 갔다. 종이에 담긴 마음은 전자 메시지보다 더 따뜻하고 선명하게 느껴졌다.

받은 편지에 하나씩 표시를 남기고 수신함에 정리하려 서랍을 열자, 그 안에 쌓여 있던 편지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몸을 숙여 주어 보니, 이 편지들의 수신인은 모두 지휘관 본인이었고, 봉랍은 반쯤 찢어져 개봉한 흔적이 있었다.

잠시 멈칫하다가 한 통을 꺼내 펼쳐 보니, 접힌 자국이 있는 백지였다.

오직 한쪽 모서리에 조용히 찍힌 예술 협회의 도장이 유일한 흔적이었다.

의아한 마음에 다시 서랍을 열어 표지를 확인했더니, 여긴 발신함이 아닌 수신함이었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편지들을 다시 정리해서 보관하기로 했다.

버리려는 순간 불쾌한 감각이 밀려왔고, 마치 누군가가 마음속에서 경고를 보내는 것 같았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편지들을 다시 정리해서 보관하기로 했다.

서랍을 닫으려는 손은 이내 방향을 틀었고, 자연스럽게 새 원고지를 꺼내 들었다.

수신함을 닫고 답장을 쓰는 것이 습관이자 본능인 것처럼, 수없이 반복한 듯한 동작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막상 펜을 들었는데, 어딘가 어긋난 듯한 미묘한 위화감에 잉크가 멈춰버렸다. 시작할 내용은 이미 영감 속에서 어렴풋한 형태를 갖췄건만, 펜촉만이 그것을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걱정과 안부를 물어야 하나? 상대방은 늘 떠돌아다니니까.

아니면, 오늘 밤에 본 뮤지컬에 대해 얘기해 볼까? 상대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고 가슴에 와닿는 표현을 늘 했었으니까.

쓸...

쓸 내용은 많은데...

그 순간, 머릿속에서 다시금 불협화음이 퍼졌다. “그것”은 귓가에 다가와 말없이 지휘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혼란도, 멍함도 아닌—무언가 더 깊은, 설명할 수 없는 감각.

지휘관의 시선이 편지지 가장자리를 따라가자, 다시금 "예술 협회"의 도장이 시야를 채웠다. 그리고 바로 그때, 뇌리로 <아카디아 대철수>의 포스터가 번쩍 떠올랐다.

"그것"이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 귓가에 남긴 어렴풋한 소리는 한숨이었을까, 비웃음이었을까.

고개를 저어 불편한 감정을 떨쳐낸 지휘관은 단말기를 열어 신중하게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이라에게:

안녕.

오늘 초대해 줘서 고마워.

덕분에 재밌는 뮤지컬도 보고 즐거웠어.

오늘 밤 만남에 대한 감상을 모두 적은 뒤, 잠깐의 고민 끝에 메시지를 하나 더 추가했다.

오늘 이야기했던 <아카디아 대철수>, 공연 날짜가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괜찮다면 시간 맞춰서 같이 보러 가자.

휴가도 조금 남아 있으니, 복귀 전에 밥 한번 먹을까.

인간의 시간은 순환하는 것이 아닌 직선으로만 나아간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이유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반복에 대한 갈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