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공중 정원 고급 기밀 회의.
지금까지 집행 부대는 "이합 재난 구역" 안에서 지수 제어 및 조사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회의실 정중앙의 프로젝터는 보라색과 붉은색으로 가득한 자료 사진들을 바꿔가며 투영하고 있었다. 부감 시점에서 내려다본 회색과 검은색의 집행 부대는 마치 "재앙의 바다"를 차단하는 제방과도 같았다.
지상의 연락을 받은 이후로 Ω 무기를 지속해서 투입했습니다. 오늘 오전 최전선에서 온 급보에 따르면, 적어도 두 배 이상의 무기가 더 필요하다고 합니다.
두 배라고요? 카퍼필드 해양 박물관에서의 전투가 끝난 후, 우리의 Ω 무기 저장량은 바닥을 보였습니다. 심지어 일부는 회수 재고까지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최근 며칠간의 사태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이미 물자 저장량의 안전선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두 배로 늘린다니요! 여기 계신 분들도 나중에 갑작스러운 상황이 발생했을 때, 속수무책이 되고 싶지 않을 거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해 논의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건설부가 걱정하는 건, 현재 정보 보안 문제가 잘 통제되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입니다.
그리고 정화 구역이 영향을 받지 않을 거라는 샘플 보고서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신빙성 있는 데이터는 자연스럽게 진실을 보여줄 텐데요. 소위 보안이라는 핑계로 불리한 계획 결과를 솔직하게 말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이 일이 혼란을 일으킬까 봐 걱정돼서 강조하는 겁니다!
의원님들, 잠시만요. 오늘 이곳에 모인 건, 이번 재난을 처리하는 방안과 일선 부대가 발견한 최신 정보에 대해 논의하기 위함입니다.
정화 구역의 건설 주제도 "이합 재난 구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나중에 구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정화 구역의 "순수함"과 건설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여기서 장황하게 말할 필요는 없겠죠?
당연합니다. 홍보부도 꽤 큰 노력을 했고... 게다가 저기 앉아 계신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도 홍보 활동에 많은 힘을 보태셨습니다. 이 점은 의장님께서도 이해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player name]에 대해 말이 나왔으니, 다음은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이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도록 합시다.
의원님들의 의견과 생각은 잠시 후에 알려주세요, 아마 다 듣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요.
하산은 지휘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지휘관의 차례가 되었음을 알렸다.
지휘관은 턱에 걸린 모자 끈을 풀어 헤치며, 구석 자리에서 일어섰다.
워낙 중앙에서 떨어진 자리라, 발표 자리까지 가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그러다 보니 "주목받는 시간"도 더 길어졌다.
취임 서약식 이후로 정식 제복을 입는 것도 오랜만이라 일시적으로 익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저는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 [player name]입니다.
다음은 제가 이번 사건에 직접 접하게 된 케르베로스 소대원들의 경험과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조사한 이합 생물의 이상 파동 상황을 결합해 분석하고 추론한 내용입니다.
속삭이는 토론 소리가 잦아들었고, 리의 도움으로 만든 데이터 모형이 투영되면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조사 과정 중, 이합 생물들에게서 이전에 관측되지 않았던 행동. 즉, 집단행동이 생겼음을 발견했습니다.
방금 전까지 조용했던 회의실은 다시 한번 각기 다른 토론 소리로 시끄러워졌다. 그러자 하산이 조용히 테이블을 두드리며, 계속 경청해 주기를 요청했다.
과거 저희는 이합 생물의 공격 행위를 본능으로 정의했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이합 생물은 전투 전략을 생각하지 않고, 공격 대상을 감지하면, 가장 단순하고 직접적인 공격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이합 생물이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 패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관측한 바에 따르면, 사건이 발생한 임무 지점에서 이합 생물들은 직접적인 공격이 아닌 전략적인 행동을 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부 이합 생물들이 공격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공격 목표와 이합 생물 사이에 골짜기가 있을 때, 그들 중 일부는 "다리 역할"을 맡아 수행했었습니다.
이 "다리 역할"을 맡은 이합 생물들이 "목표를 공격"한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지휘관님께서 예로 든 상황을 보자면, 가장 앞에 있는 이합 생물은 당연히 골짜기에 빠질 겁니다. 이합 생물들의 시체가 계속 쌓이게 되면, 다른 이합 생물들이 건너갈 수 있게 되겠죠. 그럼, 자연스럽게 골짜기에 빠진 이합 생물들이 다리가 되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이런 행동은 이합 생물이 공격 대상을 접근하기 위해 그런 것과 별만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행동 자체는 유사할 수 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개별 본능이나 목표를 포기하고, 집단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의식"을 주도적으로 형성했다는 점입니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실제로 발견한 것은 일부 이합 생물들이 다른 이합 생물들을 위해 "자살"이라는 대가를 치르며, 길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자살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렇게 한다면, 그건 우연이라고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 의원은 눈썹을 찌푸리며 이쪽을 바라봤다. 의원이 손가락 관절에 힘을 주며 가리키는 것을 보아, 그도 내용이 뜻하는 공포를 인지한 것 같았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임무 지점을 조사하던 중 비슷한 이합 생물들의 사체 더미를 발견했지만, 그런 살상력을 낼 만한 발원지를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이합 생물들이 자살했다고 가정한다면...
그럼, 이합 생물들은 무엇을 위해 다리를 만든 겁니까?
잠깐만요, 설마...
맞습니다. 전 이러한 이상 현상이 이합 재난 구역의 출현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임무 지점들은 모두 이합 재난 구역 근처에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먼 곳에서 다리를 놓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합 생물들이 어떻게 죽음을 통해 이합 재난 구역에 힘을 실어준다는 겁니까?
케르베로스의 대원이 언급했듯이, 이합 재난 구역 안의 이합 생물들이 죽게 되면, 체액이 빠르게 땅에 스며들면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부화되어 나옵니다.
갑자기 신이 인간을 창조하는 신화가 생각나네요, 신이 진흙과 물을 섞어 사람 모양을 만들고, 그 진흙 인형이 사람이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창조물이 성에 안 차면, 다시 진흙탕에 던져서 새로 만든다... 뭐 이런 뜻입니까?
그 전자기 교란은 무엇입니까? 이합 생물의 새로운 특성입니까? 보고서에 따르면, 작전 소대가 임무 수행 중에 심각한 신호 교란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과학 이사회에서 방금 의견을 보내왔습니다. 교란의 원인이 어떤 생물의 전자기 신호와 유사하다고 하며, 이합 재난 구역의 활동과 빠른 증식과도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고 합니다.
케르베로스 소대원들이 이합 재난 구역에서 핵심 적을 처치하고 탈출한 후에 교란이 급격히 줄었습니다. 이것으로 과학 이사회의 의견을 어느 정도 뒷받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합 생물의 단위체는 아직 신호 교란을 일으킬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는 건... 죽은 이합 생물들이 모두 물로 변해서 땅속에서 이합 재난 구역으로 모인다는 겁니까? 이건 좀... 땅을 파서 확인해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최전선 소대가 발굴을 시도해 봤습니다. 하지만 토양 내 퍼니싱의 지수가 정상 수준보다 높다는 것을 제외하곤 특별한 점이 없었습니다.
현재 과학 이사회는 퍼니싱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동 방식에 대해서도 100%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정화 구역 범위의 관점에서 봤을 때, 또 다른 추측이 있습니다.
이합 생물의 변화가 관찰된 모든 지점이 이합 재난 구역을 포함해서, 모두 정화 구역 바깥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아치 모양으로 분포돼 있습니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말씀드리면, 정화 구역에서 한 발짝만 밖으로 내디딘다면, 바로 고위험 지역에 들어갔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Ω 무기를 추가로 배치하는 게 필수인 것 같습니다. 인류의 첫 번째 안전 구역을 감옥처럼 만들 수는 없지 않습니까?
건설부에 소속된 의원이 흥분하며 일어섰지만, 그의 말에 아무도 동조하지 않자,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우린 실제로 정화 구역 또는 반이중합 탑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과학 이사회 내에서는 대체로 "흡수설"을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반이중합 탑이 Ω 무기와 유사하게 퍼니싱을 흡수한 후 정화한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이 많은 지지를 받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정화 구역 가장자리에서 검출한 퍼니싱 수치가 중심과 마찬가지로 "절대 정화"의 값인 0이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여과탑이든 Ω 무기든, 거리가 멀어지면 퍼니싱을 대항하는 효과가 조금씩 감소했습니다.
그래서 여과탑이나 Ω 무기를 사용하려고 할 때, "최적의 유효 범위"를 고려해야 했었습니다.
하지만 "흡수설"이 틀렸고, 반이중합 탑이 "정화" 원리가 아니라면, 정화 구역 안에 존재했어야 하는 퍼니싱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게" 된 건지가 의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현재 단계에서 정화 구역의 존재로 인해 예상하지 못한 변이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변이라니... 모든 이합 생물이 집단행동을 하는 종류로 변이하게 된다면...
의원은 입을 가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
최악의 상황은 이합 생물들이 자신들만의 종족이나 문명을 발전시킬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모두가 침묵에 잠겼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수많은 인력과 자본 그리고 생명을 소모해 가까스로 이겨낸 과거의 적들을 떠올렸다.
그들에게 홀로 맞선 인류가 단결과 희생을 통해 불가능해 보이는 승리를 거둔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만약 그정도로 강력한 그들이 주저하지 않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끊임없이 쳐들어온다면, 인간은 또다시 승리할 수 있을까?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들은 실제로 어떤 힘에 영향을 받아야 행동이 바뀐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공격 이외의 본능을 부여해 준 신과 같은 명령자가 있고, 그들이 "부름"을 받게 되면, 집단 본능을 최우선으로 삼게 된다는 겁니다.
당분간 그들은 개체 의식이나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얻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조금의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니콜라가 지휘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니콜라와 하산은 21호가 혼수 상태에서 어떤 힘에 유혹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21호가 보조 기계의 침식 때문에 의식 공유 인터페이스를 통해 의식의 바다가 혼란스러워졌는지, 아니면 실제로 어떤 지배적인 힘과 대화를 나눈 것인지에 관해선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 보고에서는 21호의 상황을 공유하지 않기로 했다.
이번 이합 재난 구역 사건에 대한 특별 정보 요약 및 추측 내용 보고를 마칩니다. 이상입니다.
[player name]의 말에 따르면, 이제 Ω 무기를 얼마나 투입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듣기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이는데, 그냥 손 놓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겁니까? 하지만 지금 포기하거나 정화 구역의 건설을 늦춘다면...
물론 그러면 안 됩니다.
일단 정화 구역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Ω 무기가 사치스러운 소모품이긴 하지만 단순한 처방만으로는 결국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이번 임무 중에 이합 재난 구역의 출현 전조를 발견해 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이합 재난 구역을 통제함과 동시에 정화 구역 주변의 감시 강도를 높이는 겁니다. 적어도 두 번째 이합 재난 구역부터는... 사전에 출현 전조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럼, 달 표면 기지가 하루빨리 수리를 마치고, Ω 무기의 수요 공백을 채울 수 있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그 후로 한 시간가량의 치열한 자원 배치 논쟁이 벌어졌다. 이합 재난 구역이 나타나기 전부터 각 부서는 이미 여유가 없어진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의 인류는 현실적 의미에서든, 심적 인식에서든, 모두 간절히 정화 구역을 바랐다.
그래서 더욱 정화 구역의 건설을 멈출 수 없었다. 문제와 필요는 수레바퀴처럼 머릿속에서 끝없이 돌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결정을 하는 것도 최전선에서 싸우는 것만큼 힘든 일이었다.
회의실을 나올 때쯤, 제복 안 옷들이 어느새 피로에 젖은 땀으로 축축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하품하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문을 나서니 익숙한 복도가 보였다. 지휘관은 바로 휴게실로 돌아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엘리베이터에서 한 걸음 나아갔을 때, 마침 시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지휘관을 보지 못한 채, 단말기에 표시된 정보를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오, 아! [player name] 선배님! 죄송해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카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무거운 표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녀는 단말기를 끄고, 평소처럼 활기찬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들었다.
단말기의 스크린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어느 실종된 구조체의 목격 정보가 스크린에 표시돼 있었다.
시카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했다.
길고 텅 빈 복도를 지나 모퉁이를 돌았을 때, 벽에 기대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조용한 실루엣이 보였다.
음? 오, [player name]
고개를 끄덕인 21호는 옆에 닫혀있는 문을 가리켰다.
대장을 기다리고 있어.
머리를 들어 문 위의 표시를 봤다. 어떤 공용 휴게실이었는데, 종종 임시 회의실로 쓰이는 거 같았다.
21호에게 시간을 좀 더 줘야겠어.
예전에 21호의 머릿속에서 그랬잖아, 복귀하면 시간 좀 내달라고. 뭘 하려고 했던 거야?
[player name].
방금 그가 그러던데, 21호가 원하는 건, 인간의 냄새가 아니라 동족의 냄새라고. 사실 그 말이 맞긴 해.
21호는 모두와 같은 냄새를 갖고 싶어.
대장, 녹티스, [player name] 그리고 21호를 두려워하고, 21호가 폐기되길 바라는 사람들 말이야.
너희들은 모두 인간이잖아. 만약 나도 인간의 냄새를 가지게 된다면...
21호가 제기한 문제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여러 권의 철학 서적을 참고하면서 세심하게 토론해야 할 정도로 복잡한 것이었다.
현재 상황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을 완벽하게 뒷받침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적이 21호를 현혹해 그 상황을 이용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21호는 이해했어. 네가 말한 것처럼 인간과 인간은 서로 다르고, 21호도 완전히 똑같은 동족을 찾지 못할 거야.
나 자신을 제외하고 말이야.
지금 난 인간의 냄새 같은 건 필요 없어. 21호는 21호만의 냄새가 있으니까.
대장이 말한 것처럼, 21호는 21호 자신을 자유롭게 해야 해.
21호는 나에게 필요 없는 것, 하고 싶지 않은 것, 좋아하지 않는 것을 거부할 자유가 있어.
마음속엔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있었다. 하지만 21호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듣고 나니, 굳이 복잡한 철학적 모형을 다시 정리할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절대적 동족인 "나"는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기에, 상대를 붙잡기 위해 제한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다.
다른 요소들은 주관적 자아라는 토양에서 자라난 세계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토양이 존재하는 한, 제약을 뛰어넘는 자유로운 영혼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으응.
21호는 작은 동물처럼 부정하는 콧소리를 냈다.
21호가 꼬마의 물건을 뺏은 그들을 물리쳤어.
그들이 21호의 손에서 대장을 빼앗아 가기 전에 말이야.
하지만 21호는 알아. 난 꼬마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했어.
그래서 21호는 나 자신에게 벌을 주고, 꼬마를 여기에 묻으려고 해.
21호는 자기 기체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영원히.
더 이상 나쁜 것들이 21호의 "하루가"를 빼앗아 가지 못하게 할 거야.
캐논이 가르쳐 준 거야.
캐논은 21호와 꼬마의 친구였어.
좀 더 물어보려던 순간, 옆에 있는 공용 휴게실에서 금속 타격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공용 휴게실 안.
아아, 죄송해요. 죄송해요
라스티는 테이블 위에 있던 단말기를 다시 집어 든 후, 건성으로 뒷면을 몇 번 두드렸다.
실수로 손이 미끄러졌어요. 그런데 단말기랑 테이블이 부딪쳤을 때, 이렇게 큰 소리로 울릴 줄은 몰랐어요.
괜찮다면, 계속해도 될까요? 아니면 이스마엘 선배님께서 직접 이 일에 관해 물어보시겠어요?
이스마엘은 그저 후배에게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부탁을 받지 않았다면, 우리도 이런 심문 할 일이 없었을 거야.
심문하다 보면, 대부분 말하는 이가 압박을 받겠지만, 물어보는 이도 마음이 편치 않아. 그래서 베라가 우리를 너무 적대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맞아. 그건 내가 보증해. 이스마엘 선배님이 남의 부탁을 들어주는 건 정말 드물어.
이스마엘은 일관되게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시선은 말한 대로 상급자의 심사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런데도 베라는 특유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압박이라... 난 별로 느끼지 못하겠어. 너희들이 힘들다면, 어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어때?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케르베로스 소대의 대장인 네가 특별 관리 장치를 감시 중인 구조체에게 사적으로 넘겨준 것으로 보인다.
이건 심각한 직무 유기 행위에 해당... 음, 이렇게 적혀 있어.
"입수한 정보"라고?
베라는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누가 뒤에서 물결을 일으키고 있는 걸까?
역시 21호의 독특함 때문일까? 21호를 통제하고 싶다면, 베라는 분명 거슬리는 걸림돌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21호가 기체의 전투 데이터를 제출한 뒤에 "그쪽"에선 기회를 잡아 자신을 케르베로스 소대의 구조에서 분리하려는 구실을 찾으려고 하는 건가?
하지만 군부는 알고 있을까? 그 사람에게는 베라가 대장의 위치에 있어야만, 비공식 임무들을 도와줄 수 있다.
아니면, 일부러 베라에게 접근하려는 사람들을 놔두겠다는 건가?
이게 니콜라가 말한 "미끼"인 건가?
또 다른 가능성도 있었다. 이번 일은 베라를 향한 경고일 수도 있다. 사나운 개로서, 자신의 위치를 확실히 인식하고 주인이 준 자유를 넘어서려고 하지 말라는...
결국 명령을 내리는 사람에게 중요한 건, 계속해서 베라가 명령에 따르는 것이었다. 그녀가 어느 소대에 속해 있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베라가 규칙을 안중에 두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지배자 입장에서는 손에 쥔 칼날이 혹시 자신을 베지는 않을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감사원이 직접 찾아왔다면, 손에 쥔 "정보"에 대해 꽤 자신이 있는 거겠지?
근데 솔직히 말해서 그 전투에서 21호는 둘째치고, 내 기억에서도 나와 21호가 제정신이었는지 확신할 수가 없어서 말이야.
주눅 들지 않은 베라는 오히려 질문을 던진 이에게 문제를 던졌다.
맞아. 보고서를 보면 정말 위험천만한 싸움이었던 것 같아.
베라, 내가 분명히 말해둘게. 오늘 우린 너에게 어떤 죄를 선고하기 위해서 온 게 아니라, 그 전투에서 벌어진 권한을 넘어선 행동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서 온 거야.
역시 이스마엘 선배님이시네요. 심문 상대에게도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주시다니요.
그거참 고맙네. 이 "선배"님의 직급이 꽤 높은 걸로 기억하는데? 이런 사소한 일에도 직접 나서다니요?
혹시 별도로 알고 싶은 일이 있는 건가?
친한 동료에게 부탁받은 거야. 사실, 나도 권한을 넘어서는 이런 사건은 직접 처리하고 싶지 않거든.
하지만 감사원에 있다 보면, 피할 수 없는 책임도 있는 법이지. 그렇지? 라스티.
음... 자료에 따르면, 상황을 판단한 뒤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권한을 가진 베라가 직접 마그네틱 키를 사용해야 한다고 기록돼 있어요.
여기서 상황 판단은 베라가 후에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경우를 예상해서 후속 전투에서 21호의 기체 제한을 해제하는 것도 포함돼 있어.
21호의 새 기체는 매우 특별하기 때문에, 그녀를 제어할 수 없게 된다면, 모두가 원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돼.
그거야 나도 알지. 21호 임시 복귀 협의의 첫 번째 단락, 세 번째 문장이잖아.
하지만 내가 말했듯이, 21호든 나든 그 전투에 대한 기억이 분명하다고는 보장할 수 없어.
심문 상대가 무죄 추정의 원칙을 주장하는 건가요? 그런 거죠, 이스마엘 선배님?
음, 베라의 의도를 대략 이해했어.
하지만 라스티가 언급했듯이, 감사원엔 실제로 어떤 자료들이 있어. 베라의 태도를 봤을 때, 감사원에서는 그 모호한 증거들을 최대한 조사할 거야.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진실을 어서 찾아냈으면 좋겠군.
맘대로 해.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정말 너희들이 예상한 행위가 일어났다면, 상부에서는 어떻게 처벌할 생각인 거지?
21호의 문제라면, 후속 조사를 받기 위해 데려갈 거야. 그리고 네 문제라면, 케르베로스 소대의 대장직을 내려놓아야 할 거고.
쳇, 기강을 제대로 잡네. 넌 어떻게 생각해?
문에 바짝 귀를 대고 있던 21호가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뒤로 뛰어오르자, 감사원들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게감이 있고 친근해 보이는 이가 지휘관을 보고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후배 구조체는 "드디어 끝났다"라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천천히 걸어 나온 베라는 21호를 보고 난 뒤, 21호 앞에 서 있는 지휘관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오?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의 차림새가 꽤 대단한 인물 같아 보이는걸.
넌 잘 알려진 대영웅이잖아. 고철 덩어리를 두른 네 홍보 사진은 치워버리고, 이 옷차림으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진정한 영웅의 멋이란 이런 거지.
흐음.
21호. 왜 너만 여기 있는 거지? 녹티스 그 자식은 왜 아직도 안 온 거야?
녹티스는 대장이 엄청나게 혼날 거라고, 좀 더 있다가 올 거래. 기다리는 건 싫다나 뭐라나.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녹티스가 왔네.
복도의 다른 쪽 끝에서 튼튼한 구조체가 머리를 긁으며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중간에 이스마엘과 라스티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녹티스는 멀리서부터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어? 일찍 오는 것보다는 때맞춰 오는 게 낫지.
그레이 레이븐, 넌 왜 여기 있어? 너도 술 마시러 가는 거야?
그래. 너도 같이 갈래? 오늘따라 멋지게 꾸미고 나타났는데, 위대한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의 모습을 더 많은 사람이 봐야 하지 않겠어?
[player name], 정말 안 갈 거야? 녹티스가 산다는데.
뭐? 삼칠아, 네가 사는 거 아니었어?
재수 없는 녀석이 사는 거야.
음, 그럼 녹티스네.
뭐라는 거야? *, 그럼 난 빠질게.
내 명령을 거역한다고? 21호. 저 녀석을 혼내줘.
으르렁...
이건 대장의 명령을 거역한 널 교육하는 거야. 만약 누가 물어보면, 대장에게 제대로 교육받았다고 인정해.
누가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한다고 그래. 야, 야, 야! 빨리 날 풀어 줘. 삼칠아!!!!!!
녹티스, 재수탱이.
경고하는데, 이번에 진짜로 화낼 거야.
21호한테 지난번 그 전해액을 사준다면 말이야.
망고 맛으로 20잔.
쉬... 긁지 마. 긁지 말라고!!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살게. 오늘은 네가 다 마실 때까지 지켜볼 거야. 아니면 이 어르신한테 제대로 혼날 준비나 해.
케르베로스 소대가 조금씩 멀어지면서, 시끌벅적했던 복도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21호가 진심으로 웃는 모습을 보며, 과거 그녀가 모방을 통해 지었던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진심 어린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걸 알까?
모방하지 않고, 분석하지 않고, 오롯이 21호 자신만의 미소를.
"모든 사람의 삶은 그들이 스스로 정한 길을 대표하고, 그 길 위에서 걷는 노력과 그 길의 계시를 대표한다."
"어떤 사람도 자신을 완전히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그렇게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이는 서툴게, 어떤 이는 현명하게,
모든 사람은 자기 능력을 다하려고 한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과거 원시 시대의 점액과 알껍데기를 가지고 있으며,
삶이 끝나는 그날까지 자신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결코 되지 못하고, 개구리나 도마뱀, 개미로 항상 남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허리 위는 인간이지만, 아래로는 물고기였다."
"모든 사람은 자연이 인간을 창조하는 것에 대한 한 번의 도박을 대표한다."
"우리 모두 같은 근원에서 왔으며, 우리의 어머니로부터 모두는 같은 문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각자 각기 다른 깊이의 실험을 통한 우리는 자신의 운명을 향해 노력하며 나아가려 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만, 오직 자신만이 자신을 설명할 수 있다."
-헤르만 헤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