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이 이곳에 조금씩 퍼져나갔다.
하지만 기억 속 장면과는 다르게, 여기엔 발신자와 같은 벽시계는 걸려있지 않았다.
시곗바늘이 여섯을 가리키지 않으면, 마음속 익숙한 그 가사를 재생하지 않았다.
시곗바늘이 일곱을 가리키지 않으면, 그녀만의 이동 의료기는 곁에서 맴돌지 않았다.
그러면 백색 외에 유일하게 깜빡이는 색깔이 켜지는 의료기의 불빛은 볼 수 없었다.
바닥을 뒤덮은 하얀색은 불을 켜지 않은 방 안에 숨어 그녀의 머리카락과 귀밑머리를 올라탔다가 인공 목구멍에서 갑자기 멈췄다.
그다음, 검은색 구속기가 순백의 기체 위에 한계선을 그었다. 그렇게 되면, 과거의 백색은 여기서부터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었다.
검은색으로 둘러싸인 백색의 소녀는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미완성품처럼, 구속기를 조정하는 기기들이 자신을 둘러싸도록 내버려뒀다.
이 순간, 표본을 관찰하는 듯한 관찰실 밖 시선이 단일 유리 벽을 통해 그녀와 관련된 모든 데이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오늘의 테스트 데이터가 어제보다 떨어지는데?
이번 주 내내 BPH-22의 의식의 바다 안정률은 합격 수준이었잖아.
네. 맞아요.
오늘 그녀의 보조 기계가 정례 점검 때문에 곁에 있지 않아서, 의식의 바다 상태에 영향을 준 거 같아요.
보조 기계에 있는 의식 공유 모듈은 예전에 모방 AI로 교체하지 않았어? 왜 BPH-22의 기체 상태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거야?
그녀는 AI 보조 기계의 피드백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어요. "꼬마를 돌려달라."는 식의 말을 계속하면서 여러 번 의식의 바다에 파동을 일으켰어요.
그래서 기체에 안정적으로 적응하기 시작한 후에 의식 공유 모듈을 다시 바꿔놨어요.
이러면 새 기체 때문에 발생한 차이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어요.
하... 마치 어린아이 달래듯이 그녀를 달래준 거네?
내 기억으론 그쪽 사람들이 새 기체에 요구한 조건 중에는 강도뿐만 아니라 BPH-22의 의식의 바다를 안정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어.
그녀의 의식의 바다가 불안정한 원인 중 하나는 보조 기계가 그녀 본체의 의식을 어느 정도 공유했기 때문이잖아.
난 이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실제 아무 효과도 없는 실험에 자원을 낭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어.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보조 기계의 의식 공유 모듈을 다시 바꾸긴 했지만, 새 기체와 보조 기계 사이엔 의식의 바다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가 없어요.
그럼, 그녀는 보조 기계를 흐릿하게 감지할 순 있어요. 하지만 어떠한 연결 조작 행위도 없기 때문에 이전처럼 그녀의 기체 연산 능력을 분산시키지 못할 거예요.
긴장한 상태로 설명을 이어나가는 아합의 말하는 속도는 평소보다 두 배는 빠른 거 같았다.
그럼, 넌 그녀에게 이런 "심리적" 위로 수단이 정말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네. 맞아요. 그녀의 상황이 좀 특별해서요. 하하하하.
아합. 너 몇 살이라고 했지?
뭐, 뭐 때문에요?
넌 네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순진한 기운이 풍기지만, 넌 항상 날 놀라게 만들어.
그쪽으로 옮겨볼 생각은 없어?
저... 절대 그런 생각 없어요!
프로젝트 데이터가 좋지 않다면, 문제가 되는 부분을 최적화해.
BPH-22가 원래 네 연구 성과였다는 건 알아. 그리고 그게 네가 이 프로젝트를 주도할 수 있는 이유야. 하지만 네 위치를 잊지 마. 성과에 대해 지나친 감정을 품지 말라는 말이야.
무기와 의식의 바다를 함께 사용할 수 있게 된 건 확실히 좋은 진전이야. 하지만 과학은 과거 위에 서서 끊임없이 완벽하지 못한 부분을 반복 수정해 나가는 것이 필요해.
과거의 실험적 결정이 지금의 약점을 만들었다면, 이젠 과거의 썩은 뿌리를 뽑아낼 때야.
내 눈엔 네가 BPH-22를 아직 탯줄이 붙어 있는 인공 아기처럼 여기면서, 그녀의 실패를 계속 봐주고 있는 것처럼 보여.
그래서 이후 적합 실험은 네 프로젝트 계획에 쓰인 대로 진행해. 그리고 그녀가 "안정적으로 독립 전투"를 할 수 있게 만들어.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프로젝트 종료 신청서를 제출하는 게 좋을 거야.
네...
전투 데이터는 어때? 계속 이 수준이었어?
우리가 받았던 기존 기체의 데이터에 비해 새 기체의 전투 능력은 현저히 향상되었어요. 그리고 의식의 바다 제어 불가 문제는 세 번밖에 발생하지 않았는데, 구속기를 사용해 신속히 제압할 수 있었어요.
그래도 이 기체에서 예상했던 전투 수준보다는 한참 못 미치는군.
예전보다 좀 더 강해진 게 무슨 소용이지. 네 계획은 "전대미문의 향상"이었잖아?
"구속기는 제어 불가를 방지하고, 전투 능력의 일부를 일시적으로 제한할 뿐만 아니라, 기체 의식의 바다가 안정된 후에 전투력을 점진적으로 해방하는 역할을 해요."라고 네가 말했잖아.
지금 보면 전투 능력을 제한할 필요가 전혀 없는 거 같군. BPH-22는 아직 현재의 임계점에도 도달하지 못했어.
……
나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할 줄이야.
네가 알아서 해. 납품 날짜가 멀지 않았어.
손에 든 식어버린 커피를 재활용 기기에 부어버린 베살리우스는 단말기를 책상 위에 대충 던져두고는 관찰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나였다면, 어떻게든 그녀가 "태반"을 처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스스로 싸울 수 있게 만들었을 거야.
아합 옆에 있는 제어 단말기를 가리킨 베살리우스의 그림자가 회색 철문 뒤로 빠르게 사라졌다. 아합이 휴면에 들어갔던 스크린을 켜자, 보조 기계 AI 모듈을 활성화하는 선택 항목이 화면에 뚜렷하게 나타났다.
아합의 손가락이 버튼 위에 머물렀다.
아합은 감시창 너머의 소녀를 보며, 처음으로 실전 실험을 했던 장면을 떠올렸다.
잘했다. 아합. 이제 우리에게 보여줘라.
네가 자랑하는 "유일무이한 새 기체"를 말이다.
순백의 구조체 소녀는 아합의 상상을 초월해 실험 구역의 적들을 모조리 찢어발겼다.
본능에서 우러난 공격 행동으로 그녀는 전투를 위해 태어난 야수가 됐다.
21호라 불리는 야수 본능이 인간의 모습을 한 작은 몸 안에서 날뛰었다.
그건 순수한 야수의 본능이었다.
갓 태어난 동물들은 대개 처음 접촉한 생물이나 처음으로 겪는 사건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되고, 이러한 인상은 무의식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이달로스에서 보낸 공백의 시간은 그녀가 인간으로서의 "갓 태어난" 단계에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구조체로 다시 태어난 21호가 의식을 가진 후 처음으로 익힌 건 본능을 이용해 끝없는 전투에 맞서는 거였다.
"정상적"으로 개조된 구조체가 이어서 극복해야 할 것이라면, 이후의 전투에서 "인간"의 정체성과 초인적 전투 능력 사이에서 어떻게 차이를 조절할 것인지였다.
하지만 21호에게는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동물 같은 자신 안에서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이 문제였다.
구조체 개조 기술이 대규모로 실전에 투입되긴 했지만, 실제로 의식의 바다가 기체에 미치는 영향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컸다.
21호의 기존 기체는 물리적 구성상 의식의 바다가 제어 불가 되는 상황이 많았다. 그건 21호의 자의식 자체가 문제를 일으키는 주요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자의식이라...
아합은 쿠로노의 행동 스타일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진보는 반드시 희생을 동반한다."고 믿는 베살리우스의 지휘하에서 "연구"의 중요성은 논란이 있는 많은 문제보다 높게 평가될 수 있었다.
아합은 자신을 소위 정의로운 사람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결국, 과학이 진보하는 길에서 정의나 불의는 고작해야 성과의 부수적인 측면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합은 스크린 위 버튼을 터치하지 않고, 스크린을 다시 한번 눌러 휴면 모드로 전환했다.
적응 테스트 때는 보조 기계가 굳이 있을 필요는 없지만, 테스트가 종료됐을 때 최소한의 안정감 정도는 너에게 제공할 수 있겠지.
띠띠.
단말기 스크린이 다시 밝아졌고, 구속기의 조정이 완료됐다. 아합은 줄마다 수치를 점검했고, 오류가 없음을 확인한 후, 잠들어 있는 소녀를 깨우기 위해 준비를 했다.
오늘의 조정은 끝났어.
21호는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조용히 눈을 떴다.
시각 동기화 기능 때문에 봉쇄됐었던 왼쪽 눈은 더 이상 보조 기계와의 공감이 필요 없게 되어, 전투 기능성을 향상한 의안으로 교체됐다.
구속기의 수치를 조금 올려놨어. 넌 걱정할 필요 없어. 그러니 테스트 전투에서 네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도 돼.
불편한 느낌은 없지?
없어.
연구소에서 나한테 씌운 속박 목줄하고는 좀 다르네. 하지만 그렇게 다른 것도 아니야.
21호의 실험, 통과하지 못한 거야?
아합은 갑자기 새 기체의 감각 능력이 기존 기체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시적으로 제한했다고는 하지만, 방금 베살리우스와 아합이 나눈 대화도 21호가 들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어... 그렇지 않아.
꼬마 잘못이 아니야.
꼬마? 아... 보조 기계를 말하는 거구나.
새로운 몸은 인간 같지 않아. 21호가 생각한 것과 좀 달라.
21호가 고개를 흔들자, 머리 위에 달린 귀 모양의 장치가 예민한 동물의 귀처럼 살짝 떨렸다.
하지만 네가 적응했던 기체 중에서 이 기체의 데이터가 가장 좋아.
모든 게 인간이나 동물과 같지 않아. 그런데 21호와는 닮았어.
21호는 이 말을 하면서 살짝 눈을 내리깔았지만, 곧바로 고개를 다시 들었다.
하지만 21호는 인간의 냄새를 가지고 싶어.
인간의 냄새가 없으면 주위 사람들이 21호를 폐기하려고 해. 그들이 날 두려워하는걸, 난 느낄 수 있어.
내가 그들과 똑같아지길 원할수록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졌고, 더 인간 같지 않았어.
내 몸에 인간의 냄새가 없다는 건 나도 알아.
그래서 난 구속기를 싫어하지 않아. 머리가 혼란스러울 때 멈출 수 있게 해주고, 다른 사람들이 날 무서워하지 않게 해줘.
어떻게 해도 상관없어. 21호는 꼭 테스트를 통과해서, 대장과 녹티스 곁으로 돌아가야 해.
한 달 남았는데, 최선을 다해볼게.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돌아가면 베라한테 기체 데이터 스냅 촬영한 걸 4시간마다 추출해 달라고 해.
알았어.
석 달 후, 지상 임시 군용 주둔지
구역 내에 이합 생물의 활동 흔적이 실제로 있어. 더 구체적인 정보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해.
알겠어요. 시스템에 따르면 이틀 전에 신청한 물자가 수송기를 통해 전달됐다고 하는데, 확인해 주세요.
방금 대충 세어봤는데, 건축 재료류가 신청 수량의 절반도 안 돼.
지금은 정화 구역의 건설 작업이 중요한 시기예요. 그래서 관련 물자 배분은 우선순위에 따라 이루어질 수밖에 없어요. 이건 그들이 안전한 곳으로 더 빨리 이주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에요.
건축 재료 외에 현재 보충해야 할 자원이 또 있나요?
잡일을 도와줄 인원이 대여섯 명 정도 있었으면 좋겠어. 서너 명이라도 괜찮아. 전투력이 높을 필요는 없고, 기기만 사용할 줄 알면 돼. 적어도 일할 줄 아는 사람은 잡일에서 해방해 줘야 할 거 아냐.
그리고 염증 치료제와 혈청이 더 필요해.
보육 구역에 침식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 그들이 가진 약물이 심각하게 부족해서 내가 가진 여분의 수량으로는 현재 소모량을 감당할 수 없어.
게다가, 보육 구역에선 계속해서 실종 사건이 보고되고 있어. 이합 생물과 관련이 있는 거 같아. 하지만 지금 그걸 하나하나 따져볼 시간이나 인력이 없어.
실종 문제를 신속하게 처리하려면, 인력과 물자는 별도로 책정해야 할 거야.
약품 물자라면 찾았어요. 몇 시간 후에 정화 부대의 임무 항로가 당신이 있는 구역을 통과할 예정이니, 그들이 가지고 갈 수 있을 거예요.
잠시 후 정화 부대의 대장 식별 번호를 당신의 단말기로 보내드릴게요.
인력 문제는 현재 조정 가능한 인원이 매우 제한적이에요. 예비역이라 해도 이 레벨의 임무에 참가할 수 있는 이도...
요청을 신청 대열에 추가했어요. 지휘 센터에서 추가 심사를 거쳐 통보해 드릴 거예요.
알았어.
베라가 통신을 끊었다. 거대한 체구의 그림자가 문발을 들추고, 그에게 다소 좁은 천막 입구로 들어왔다.
통신 끝났어? 와, 무슨 표정이 그래. A 구역의 정찰 보고서를 완성했어. 받아.
지휘 센터의 인색한 노인네들, 잡일 도와줄 인원도 보내주지 않는다니. 짜증 나게.
베라가 해결 못 하는 일이 또 하나 늘었네. 하하하하하하!
맞아. 그러니까 앞으로 48시간 동안은 쉴 틈도 없을 거다.
인력이 없으니까, 나도 밑에 있는 녀석들을 쥐어짤 수밖에 없잖아.
어? 소대 규정엔 그렇게 적혀 있지 않은 걸로 아는데?
네 휴게실 안 그 쓰레기 더미에서 규정을 찾아낼 수 있겠어?
아마 못하지 싶은데.
그럼, 입 다물어.
내가 성격이 좋아서 사소한 일까지 따지지 않는 거야.
삼칠은? 그 녀석은 B 구역 배정받고 갔다가 아직 안 돌아왔지? 좋아, 내가 이겼어!
베라가 단말기에 표시된 시간을 힐끗 봤다.
21호와 녹티스에게 주어진 임무는 각각 두 명의 구조체를 이끌고 보육 구역 주변을 탐지해서 이합 생물의 동향을 정찰하는 거였다.
평범한 구조체가 단독으로 정찰 임무를 완수할 수 있지만, 잠재적 위험과 적에 대한 인식 능력을 고려했을 때 엘리트 소대원과 동행하는 것이 더 확실한 결정이었다.
베라는 21호와 연락을 시도하기 위해 단말기를 조작했다. 쿠로노 측에서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21호는 기체에 "완벽하게 적응을 마쳤다."라고는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혹시 급작스러운 상황이 발생한 건 아닌지 확인이 필요했다.
다행히 지금은 기존 기체에 비해 전반적인 전투력이 상승한 상태였다. 그래서 공중 정원은 21호가 새 기체를 사용해 활동할 수 있도록 특별히 승인해 주었고, 활동 데이터에 따라 재조정을 할 예정이었다.
베라가 통신 버튼을 누른 순간, 단말기에서 울리는 소리가 천막 밖에서 우연인 것처럼 들려왔다. 곧이어 21호가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대장. 녹티스도 있구나. B구역의 정찰을 21호와 다른 두 구조체가 끝냈어.
난 한참 전에 돌아왔는데. 에헤~ 삼칠 넌 아직 멀었어.
신경 꺼.
아니면 지금 나가서 다른 걸로 한 판 붙을래. 그럼, 네가 인정하게끔 만들어 줄게.
아니. 녹티스는 항상 생떼를 쓰잖아. 그래서 붙고 싶지 않아.
하? 내가 언제 생떼를 썼다고 그래?
요즘 너랑 베라의 얼굴이 똥 먹은 것처럼 썩어 있어. 내가 좋은 마음으로 장난친 건데. 됐어. 말아라.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21호, B구역의 이쪽은 왜 보고 데이터가 없어?
21호가 베라에게 다가가 그녀가 가리키는 지도의 한쪽 구석을 바라봤다.
그들이 다 처리했다고 했거든.
너와 함께 갔던 구조체 말이야?
어.
너희들을 잡일 도와줄 인원과 함께 보낸 건, 너희가 싸움을 더 잘해서가 아니야. 일을 제대로 끝내기 위해서가 더 중요한 거란 말이야.
정신 차려. 멍하니 있지 말고.
B 구역의 6호 구역. 21호, 지금 가서 저 부분의 관측 데이터를 보충해.
다 하고 나서 바로 단말기로 나한테 전송해. 나머지는 내가 처리할 테니까.
……
그들은 21호와 함께하길 원하지 않아.
어?
아랫입술을 깨문 21호는 뭔가 더 말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서둘러 텐트를 떠났다.
삼칠은 괜찮아? 기체를 교체한 후로 가끔 멈칫거리는 것 같아.
새 기체가 아직 익숙하지 않나 보지.
네 일은 끝났지? 장비 세트 챙기고 나갈 준비해. 네 임무는 단말기로 보냈으니, 바로 출발해도 돼.
베라의 마음속에 불안한 감정이 희미하게 퍼져나갔다. 사실 녹티스만이 아니라, 베라 자신도 21호의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비밀 계획과 이익 교환 끝에 베라는 21호의 새 기체 제작을 신청했다.
본래 의도는 21호가 "광분"하는 문제로 더 이상 고생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결국 의식의 바다와 관련한 모든 문제는 되돌릴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21호는 기체를 변경한 후, 오히려 이전보다 더 정신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 조심스러워하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이런 상태로는 기체의 예상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예상된 결과라는 것이었다.
어, 이건 뭐야? 좋은 물건인가?
내 무기 상자 건드리지 마.
저건 21호 기체의 구속기 마그네틱 키야. 어서 돌려놔. 잃어버리면 나도 어떻게 도와줄 수가 없어.
네 이름 밑으로 아직 청산하지 못한 운송 장비랑 물자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키마저 잃어버리면 행정부 애들이 널 만나고 싶어서 아주 난리일 거야. 그렇지?
구속기? 삼칠이 목에 차고 있는 거 말하는 거야? 푸는 방법이 있는데 왜 풀어주지 않는 거야? 난 보기만 해도 목이 간질간질하던데.
내가 볼 땐, 너도 목줄이 필요할 거 같아. 돌아가면 하나 사줄게. 그럼, 간지럽지 않을 거야.
베라는 말하고 싶지 않았고, 녹티스도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어깨를 으쓱한 녹티스는 검은 마그네틱 키를 베라의 무기 상자 안에 다시 넣었다.
좌표는 네 단말기로 보냈어.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이니까, 네가 가서 접선해.
꽤 먼데?! 타고 갈만한 운송 장비는?
네 다리가 있잖아.
내 다리는 적과 싸우고 제압하는 비장의 카드로 더 적합하지 않을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과 대원, 총 세 명이 우리 거점 방향으로 이동 중이야.
지휘관이 있는 쪽 이합 생물의 활동이 유독 이상한 거 같아. 수도 제법 되는 거 같으니까, 물자는 충분히 챙겨 가. 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너한테 요청도 하지 않았을 거야.
그렇군. 폭발물을 2세트 더 가져가야겠어. 아니. 5세트가 좋겠어.
준비 다 됐지? 그럼, 어서 내 눈앞에서 사라져. 그레이 레이븐의 식별 번호는 보내놨어.
알았어. 알았다고.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거점에서 직선거리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레이 레이븐이 있는 쪽이 이합 생물이 괴상하게 된 발원지인 걸까?
현재로선 원인, 범위, 구체적인 상황 모두 불명이었다. 사람이 많은 보육 구역에서 갑작스러운 상황이 발생한다면, 주둔하고 있는 구조체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레이 레이븐 쪽에서 뭔가 발견했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들이 오면 정보를 교환해 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온통 귀찮은 일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