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카를, 일어나! 얼른 일어나!
>>>음성 명령이 감지되어, 휴면 모드를 해제합니다.<<<
>>>시각 모듈을 재부팅합니다. 날짜 변경이 감지되어, 프로토콜에 따라 정례 일정 기록을 자동으로 생성합니다.<<<
>>>확인했습니다. 세계 시간 0:23 AM, UTC+4로 교정됩니다.<<<
>>>시뮬레이션 인격이 가동됩니다. 로딩을 완료했습니다.<<<
>>>글자 형식으로 내용을 기록 및 저장하기 시작합니다.<<<
어제는 무르만스크 항구를 떠난 지 23일째 되는 날이었다.
원래의 계획이라면, 모세급 쇄빙선 "나발"호는 22일째 되는 날에 바렌츠해를 떠나, 그린란드 해역과 노르웨이해 경계 구역에 들어서야 했다.
일정량의 베나드릴을 일정 기간 복용했더니, 미켈레 선생님의 뱃멀미가 많이 좋아졌다.
선생님께서 갑판에서 그림 그리기를 시도하시는 게 이번이 일곱 번째였다. 이번엔 30분 정도를 버티시다가 바닷바람이 너무 세져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저녁 무렵, 플라밍 선장이 2파운드의 대구 한 마리를 낚았다. 그래서 선장은 선생님과 함께 회를 떠서 먹었다.
현재 알코올 섭취량은 의사의 권장 섭취량에서 23%를 초과했다. 선생님은 구두로 마시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최근 반년간의 데이터로 판단할 때, 약속을 어길 확률은 89%였다.
4:47 PM, UTC+4, 선생님께서 방에서 잠이 드셨다. 수면 진입하는 시간이 평균보다 21분이 늦었다.
>>>기록을 완료했습니다. 캐시를 삭제합니다.<<<
>>>기록 모드가 재가동됐습니다.<<<
미켈레 선생님, 좋은 아침이에요.
현재 시각은 선생님의 평소 기상 시간과 다릅니다. 혹시 비상 상황이 발생했나요?
하하하, 당연히 "비상 상황"이지! 우린 곧 예정된 해역에 들어갈 거다. 선장이 요 며칠은 맑을 거라고 하니까 배에 있는 사람들도 다 흥분했어.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미켈레 선생님.
며칠 전까지만 해도 육지가 그리웠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 사람은 참 변덕스러워. 그렇지? 카를.
3개월 전에 선생님께서는 "내가 다시 UC 픽처스가 만든 쓰레기 영화를 보면, 연필로 내 눈을 찌른다!"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2주 후 "서레니티" 개봉 날 몰래 혼자 영화관에 가셔서 관람하셨죠.
전 이 사례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생각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영화는 주인공 캐스팅이 잘못됐어. 어린 남자아이의 배역인 조연이 오히려 더 눈에 띄었거든. 그것보다 내가 본 건 어떻게 알았지? 일부러 너 몰래 간 건데.
로봇은 인간과 다르게 정보 획득 방식이 다양해요.
필요한 경우, 전 선생님께 일어난 모든 일을 알 수 있어요.
허허, 하긴 그렇네. 넌 모든 걸 기억할 수 있겠구나.
카를, 갑판으로 가자.
미켈레는 조수의 어깨를 토닥였다. 둘은 십여 년 동안 이처럼 허물없는 친구 사이로 지내왔다.
문을 열었을 때, 아직 태양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바다는 고요한 어둠뿐만이 아니었다. 북극권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찬란한 오로라가 여명 전 하늘에 어렴풋이 보였다.
많은 선원이 갑판 위에 있었다. 오늘은 나발호의 휴일이기에 하루 종일 자유의 축제가 될 예정이었다.
옛 바이킹은 오로라를 여전사 발키리의 갑옷에서 반사된 빛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들은 오로라를 "신의 치마"라고 불렀고, 오로라가 죽은 용사들을 발할라로 인도해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했다고 믿었지.
이건 북극 항로 연합이 설립되기 전, 천 년 동안 전해져 내려온 오래된 신화예요.
그리고 지금도 그 전설이 진실이라고 믿는 항로 연합 사람들이 많아요.
카를, 넌 오로라가 무엇을 상징한다고 생각해?
……
로봇은 신화 따위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카를은 오로라 위에 신들이 사는 궁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건 단지 플라스마 현상일 뿐이었다. 지구의 자기장이 태양에서 날아온 입자를 포획해, 고층의 대기가 이온화되며 생기는 시각효과였다.
인간의 눈에는 웅장하고 신비로운 풍경일지 몰라도 분석된 원리는 상당히 무미건조한 것이었다.
전 선생님께서 어떤 답을 기대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카를은 미켈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 예술가의 성격은 그가 가입한 협회 내에서도 독보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켈레가 원하는 답은 오로라의 원리에 대한 설명 따위가 아닌 것 같았다.
카를, 내가 듣고 싶은 답은 없어.
전 이게 선생님의 훌륭한 그림 재료 중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너도 나 같은 창작자가 된다면, 이 광경을 그리고 싶은 생각이 들까?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
대응하는 학습 모듈을 탑재하면 딥러닝을 활용해, 모든 유파의 회화 기술을 습득할 수 있고, 역사 속 예술가의 붓 터치를 모방할 수도 있어요. 게다가 이 모든 걸 결합해, 누구도 보지 못했던 오로라를 그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선생님께서 예술 분야에 투입된 로봇을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그건 "창작"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렇죠?
모방과 결합만으론 새로운 걸 탄생시킬 수 없어. 그렇다고 해서 로봇들이 그렇게밖에 할 줄 모른다는 말은 아니야.
로봇에게서 진정한 예술이 탄생하는 그날을 기대하고 있어. 다만 나처럼 죽어가는 노인에게는 기다리기 힘든 과정일지도 모르지.
… 미켈레 선생님, 자신의 건강 상태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선생님께서는 아직 하고 싶으신 일이 많으시고, 하셔야 할 일도 많으시간않아요.
선생님께서 디자인하신 그 도시는 선생님의 가장 위대한 작품이 될 거예요.
이건 아마도 예술가의 욕심인 것 같아.
가끔 난 붓을 잡아 붙잡고선 놓지 않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해.
그래도 나에게 아직도 이런 욕심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 그래야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노력하니까.
네 말이 맞아. 나에겐 아직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남아있어. 하하, 우리가 이 배에 올라탄 것도 그것 때문이잖아!
선생님은 이번 여행에서 분명 뭔가 얻으실 수 있을 거예요.
살짝 고개를 숙인 카를이 주인에게 진심 어린 축복을 빌었다.
저기 봐, 카를! 뭔가가 오고 있어!
……
자신의 흥분을 억누르며 바다를 가리킨 미켈레가 카를을 향해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카를의 시각 카메라는 그 어떤 이상도 감지하지 못했다. 로봇은 인간과 달리 "직감"이나 "식스센스"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예감이 어떤 느낌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카를은 침묵했다. 카를의 논리 회로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합리적인 설명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반도체로 구성된 차가운 규칙을 무시한 카를은 미켈레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갑판 위가 조용해졌고, 선원들은 술병을 든 채 숨을 죽이고 바다를 바라봤다.
세계를 울리는 첫 울음소리처럼 거대한 흑백의 모습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면을 뚫고 나왔다.
그건 혹등고래였다. 고래가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자, 물보라가 카를, 미켈레 그리고 갑판에 있는 모든 선원의 몸에 튀었다.
선원들로부터 열렬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들은 술잔을 들어 건배했고, 바이킹 시대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뱃노래를 부르며, 오로라가 가득한 여명에 웅장한 광경을 본 기쁨을 축하하기 시작했다.
북극 항로 연합이 설립된 이후, 전 세계적으로 어떤 형태의 고래잡이도 금지됐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규칙을 정했다.
고래를 항해의 수호자로 섬기고, 고래의 모습을 볼 때마다 지금처럼 크게 축하하면서 만남을 기념한다는 규칙이었다.
카를, 고래가 왜 수면으로 튀어나오는지 알아?
생물학계엔 아직 이것에 대한 통일된 해석이 없어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 산소를 호흡하기 위해서, 몸에 붙어 있는 기생충을 제거하기 위해서 등 여러 가지 가설이 있어요.
그렇다면 왜 모두가 이걸 축하하는지 알아?
전 이런 행동 뒤에 있는 심리적인 동기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요.
다만 사람들이 오로라를 봤을 때와 같은 느낌일 거라고 생각해요.
너도 그런 애매한 말을 할 줄 아는구나. 카를.
미켈레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오른 걸 본 카를은 처음으로 자신의 주인이 지금 어떤 기분인지 분석할 수 없었다.
우린 고래를 본 게 아니라 "자아"를 본 거야.
우린 세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나 자신을 보고 있는 거거든.
자신이요...?
카를, 넌 무엇을 봤어? 그 고래가 해수면에서 튀어나와 네 눈에 들어왔을 때, 넌 무엇을 봤어?
……
전...
저는...
>>>기록이 중단됐습니다.<<<
기억 데이터는 여기서 재생이 끝났다.
……
아이라가 눈을 떴을 때, 소대원 세 명이 숨을 죽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다들 잔뜩 긴장한 표정이지?
내부에 구조체를 노린 전자 바이러스가 있을까 봐 걱정했어요. 아무래도 적이 남긴 물건이잖아요.
나한테 데이터를 읽어보라고 할 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잖아.
보험을 들어 둔 것뿐이에요. 해초 머리 로봇이 이런 비열한 수단을 사용할 것 같진 않았어요.
정말 문제가 발생한다면, 우리 "믿음직한" 지휘관님이 제일 먼저 아이라의 의식의 바다에 들어가 구했을 테니까요.
아이라, 그 칩에 뭐가 기록돼 있었나요?
음... 뭔가 결정적인 순간에 끊긴 느낌이었어.
아이라는 그녀들에게 자신이 본 화면을 설명해 줬다.
예상은 했었지만, 미켈레 선생님의 생전 모습을 볼 수 있을 줄은 몰랐어.
그 "카를"이라는 로봇, 그러니까 이 기억의 주인이죠... 이름은 다르지만...
지금의 세르반테스와 같은 인물이라면... 왜 그가 인간들 보다 먼저 이곳을 찾을 수 있었는지 알 것 같아요.
……
그게 사실이라면, 지난 십여 년간 무슨 일을 겪었기에 이런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걸까요?
창작자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데... 세르반테스는 이걸로 뭘 전달하고 싶었을까?
세계를 뒤흔든 대결을 본 적이 있었고, 북극 항로 연합의 옛 영광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영원히 보존하고 싶었던 걸까?
아이라, 뭔가 생각나는 게 있나요?
음... 아니!
아직은 없지만...
기억으로 재현된 광경이라도, 남의 눈으로 본 사물이라도.
고래의 거대한 그림자가 아침 햇살을 가렸을 때, 사람들은 노래하며 얼음을 부수고 세계의 극점을 향해 나아갔다.
나발호의 잔해는 인공 얼음 위에 우뚝 솟아 있었다. 저건 단순한 모조품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탑승했던 배의 파편일지도 몰랐다.
설원을 질주하는 켄타우로스는 북극 항로 연합의 수호자였다.
그녀는 백발의 구조체를 향해 여러 번 돌진했고, 얼음 동굴이 붕괴될 때, 사람들을 보호하는 지붕이 됐었다.
세르반테스는 로제타의 모조품을 이곳에 놓아, "과거"를 비추는 미니어처 가든을 밑받침하는 수호자로서 삼았다.
그의 생각은 의외로 단순할지도 모르겠네.
무슨 뜻이죠?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어, 딱히 특별한 의미는 없고.
잘 만들어진 연극은 놀라운 반전을 마지막에 놓는 법이잖아. 그러니 막을 내리기 전에 내린 평가는 모두 진정한 평가가 아닌 거지.
이 예술관은 세르반테스의 "작품"이니 결론을 내리려면 적어도 완전한 모습을 보고 난 후에 해야 마땅하지.
이건 창작자에 대한 존중뿐만이 아니야.
세르반테스가 "예술 협회" 출신인 나에게 뭔가 바라는 게 있다면...
나도 "예술 협회"의 방식으로 기대에 부응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