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메인 스토리 / 19 여명의 경계 / Story
우리도 이번 신형 특화 기체의 성공으로, 의회에서 더 많은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생겼어.
정당이라는 두 글자가 당신 입에서 나오다니, 익숙하진 않네요.
그럼, 나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거야. 가끔 규칙을 어기는 대가가 더 낮아서 그렇지. 원래는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이야.
그린스의 궤변을 듣고 있던 레베카는 확실히 득이 될 게 없다는 것을 깨닫고, 회의실 안 다른 두 사람에게 주의를 돌렸다.
리스트, 세계 정부의 상무 회의가 30분 뒤면 시작할 텐데, 외교원 의원으로 참석하는 당신도 의제를 준비하셨겠죠?
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전에 준비한 의제를 그린스에게 건넸다.
사전에 다 준비 해놨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노르만 광업 그룹의 담당자가 시민 대표로, 의회에 참석할 겁니다.
레베카는 리스트가 데려온 지나치게 화려한 옷과 장식을 걸친 남자를 봤다. 부잣집 도련님의 행색을 한 그가 레베카의 시선을 느껴, 윙크로 보답하자, 레베카는 어이없어했다.
이번 회의는 승격자에 관한 연구를 만천하에 발표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이고, 인간 진화의 새로운 가능성에 보게 된다면, 의원 놈들도 날 이해하게 될 거야.
그린스는 손에 들고 있는 개요를 뒤적거리며, 레베카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전 그린스 님과 승격자 연구에 대한 자료를 정리할게요. 리스트, 의회 쪽은 이번에 당신이 맡아서 진행해 주세요.
레베카 아가씨, 저도 있습니다. 열심히 해볼게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리스트, 내가 정말로 노안이 온 것 같군. 너의 추상적인 의제의 개요가 무엇인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레베카의 등 뒤에서 그린스의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들려왔고, 그의 목소리는 예전과 달리 위협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전 회의에서 재가동이 완료된 영점 에너지 원자로와 엔진을 공중 정원에 탑재하는 계획을 제안할 겁니다. 그래서 이민함으로써의 기능을 재가동시켜서, 인간을 태우고 지구를 떠날 겁니다.
리스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린스는 들고 있던 개요로 리스트의 머리를 때렸다. 하지만 리스트는 피하지도, 비틀거리지도 않고, 자신의 얼굴을 때리게 놔뒀다.
네 녀석이 날 배신하려는 거냐!
그린스는 이 의안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만일, 리스트가 의회에 제출하도록 놔둔다면, 설득력과 타당성을 입증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리스트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줍고는 꼼꼼히 정리했다.
당신은 쿠로노에서 제 상급자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전 당신의 부하가 아닙니다. 제 일은 기껏해야 당신에게 협력하는 겁니다. 이건 당신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아니므로, 배신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승격자에 대한 당신의 집착은 "조직"에서 한 프로젝트에 투입할 수 있는 것을 초과했습니다. 그래서 승격자에 관한 연구는 위험이 재평가될 때까지 무기한 연기될 겁니다.
그린스는 리스트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고는,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언제부터 이 모든 일을 계획한 거지.
"대어를 낚고 싶다면, 미끼를 아끼지 말라", 목적을 달성하려면, 미끼는 당연히 크면 클수록 좋겠죠. 당신과 저를 함께 미끼로 쓴다고 해도, 전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전 무슨 일이 있어도, 공중 정원을 보호하면서, 인간을 위해 가장 좋은 길을 선택할 겁니다.
그린스는 리스트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침착하고 무자비한 이 남자가 영락없는 미치광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침식체가 조금씩 늘어나면서, 퍼니싱의 농도도 끊임없이 상승했다.
[삐!] 더 이상 여기에만 있을 수 없어. 반드시 밖으로 끌어내야 해!
삐! 삐이!!
하지만 우선은 어떻게 해야,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생각하자.
가장 가까운 침식체가 두 손을 들어 카레니나에게 덤볐지만, 막 뛰어오른 순간 공중에서 멈췄다.
카레니나는 침식체의 기괴한 움직임을 경계했고, 뒤로 한 발짝 점프한 뒤, 무기를 들고 대응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침식체는 공격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공격할 수 없었다. 공중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몇 초 동안, 고정돼 있던 침식체가 갑자기 원자로 어레이실의 벽에 빠른 속도로 부딪히면서, 틈을 만들어 냈다.
카레니나는 놀란 눈으로 발밑을 봤고, 발밑의 땅에서 파도처럼 잔물결이 일었다. 하지만 카레니나는 이것은 환각이나, 지면이 말랑해진 것도 아닌, 땅 주위의 광선이 중력파에 의해 왜곡되어 생기는 시각적 효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중력파에 접촉한 침식체는 지상에 박히거나, 빠른 속도로 천장을 뚫은 뒤, 곧바로 우주 공간에 빨려 들어갔다. 심지어 공중에서 서로 충돌하는 중력 때문에, 그대로 두 동강 나기도 했다.
카레니나가 뒤로 빠르게 점프하자, 중력파가 미치는 범위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슴에 꽂혀 있던 연필이 떨어져 나와, 중력파에 의해 부스러기가 됐다.
영점 에너지 엔진!
카레니나가 생각한 가능성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원자로 어레이에 연결된 제어 중추 중에서 하나 이상이 퍼니싱에 침식되어, 영점 에너지 엔진으로 들어가는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한 후, 제어할 수 없는 중력 효과를 발생시킬 거라는 것이었다.
영점 에너지 엔진을 계속 폭주하게 놔둔다면...
침식 여부와 상관없이, 달 표면 기지 전체가 파괴될 수도 있어.
지하 깊숙이 위치하면서, 특수 보강 처리된 영점 에너지 원자로의 본체는 물론, 공중 정원 자체를 비행시킬 수 있는 이 엔진도 파괴당할 것이다.
반드시 이 모든 걸 막아야 해!
반드시 이 모든 걸 막아야 해.
최악의 상황을 준비했지만, 악화하는 사태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우리는 당연히 필사적으로 제지했지만, 쿠로노의 연구원은 신뢰성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역원 장치를 양산할 계획이었다.
정말 웃기는 일이었다. 우리를 겨누는 총들은 전혀 쓸모가 없었고, 총알은 퍼니싱에 비하면, 무섭지 않았다.
이전에, 우리 실험실의 인원은 일찌감치 감원되어, 겨우 5명만 남게 됐다. 로봇의 협력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퍼니싱에 가까이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혈청이 있음에도, 많은 사람이 퍼니싱에 장기간 노출되면서, 완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반복적으로 침식됐다. 캐논 박사조차, 뇌가 퍼니싱에 침식됐고, 더 많은 사람이 심하게 몸이 썩어서 고통스럽게 죽었다.
우리가 계속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건, 더 이상 망가진 몸이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를 겨누는 총은 더 이상 퍼니싱에 비해 무섭지 않았다.
뺏은 건 미안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서 말이야. 난 반드시 전투의 최전선에 희망이 될 것을 가지고 지구로 돌아가야 하거든.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개조된 구조체에 의해 죽는다 하더라도 말이야. 인간 전선의 붕괴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발생하게 되는 "필요한 희생"이야.
쿠로노에서 가장 얄미운 그놈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우리를 협박해서, 역원 장치 양산에 협력하게 했다.
쿠로노와 우린 그 위험을 다 알고 있었지만, "희망"이라는 날카로운 발톱이 모두의 목줄을 항상 움켜쥐고 있었다.
우린 쿠로노 사람들이 1차로 양산된 역원 장치를 가지고 간 뒤에야, 안정적으로 실행되는 역원 장치를 시험 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늦어 버렸다. 개조대에서 죽은 사람들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너무 늦어 버렸다.
결국, 우리가 두려워하던 모든 일이 발생했다.
빠른 양산을 위해, 불가피하게 로봇을 일부 과정에 투입해 제작했다. 이때, 우리의 최첨단 설비가 감지되지 않은 미량의 퍼니싱에 노출됐고, 제작하던 로봇이 침식되면서, 확산이 시작됐다.
현장에는 로봇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확산 속도는 매우 제한적이었지만, 우리가 알게 됐을 때는 이미 일부 구조체의 원체가 침식체로 바뀐 뒤였다.
그리고 침식체들은 무장하지 않은 인간들을 사냥하기 시작했고, 연구자일 뿐인 인간들은 저항할 힘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죽고, 나와 캐논 박사님만 살아남아, 영점 에너지 원자로가 있는 곳을 도망쳤다. 캐논 박사는 뇌가 침식되면서, 발생한 후유증으로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지구다! 빨리 봐봐, 지구야!
그렇다. 내가 여기까지 달려온 이유 중 하나는 이곳에 있는 우주 공간 커버를 연 뒤, 부압을 이용해, 남아있는 퍼니싱을 모두 우주로 날려버리기 위해서였다. 확실히 여기선 아름다운 지구를 볼 수 있었다.
난 캐논 박사님과 우리의 연구 자료를 유일하게 동작하는 구명 캡슐에 집어넣었고, 우주로 보내 기류를 타게 했다. 운이 좋다면, 정기 물자 수송 비행선이 구명 캡슐의 신호를 받고, 캐논 박사님을 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 영점 에너지 원자로에 아직 실행 중인 어레이를 종료시켜야 해서 갈 수 없었다.
제어 시스템에 어떤 프로그램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료시키려면, 노심이 있는 위치까지 가야 했다. 나도 캐논 박사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가장 멍청한 방법만 생각이 났다.
로봇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편리함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산소가 부족해서 일어난 생리 현상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노심까지 걸어가는데, 수명이 단축되는 거 같았다.
예상한 대로, 내부의 퍼니싱은 모두 밖으로 배출시켰지만, 그렇다고 침식체들이 움직일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모든 침식체들이 날 따라서 원자로의 노심이 있는 위치로 들어왔고, 호시탐탐 날 죽이려고 했다.
삐이이.
하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원자로의 에너지 출력을 끈다면, 침식체 모두를 이곳에 가두고, 완전히 폐쇄할 수 있다. 그럼, 다시는 열 수 없게 되고, 아름다운 푸른빛도 영원히 켜지지 않을 것이다.
이번 사건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해서, 개인으로 소장하고 있는 골동품에다 기록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녹음도 영원히 알려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여기에서 일어난 과거의 일을 알게 된다면, 아직 인간이 재난에서 멸종되지 않았다는 뜻일 거고, 우리가 달 표면 기지에서 피운 과학의 횃불이 어딘가에서 아직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거다.
때가 되면, 당신에 관한 이야기와 인간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