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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여정
>지금은... 스스슥...
261일째.
인간이 사라진 후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수십 년이 지나 모든 인간의 발자취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야수는 썩어가는 동네를 누빌 것이며 한때 인간이 살던 지역은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100년 이내의 온도 변화와 식물 침식은 금속을 팽창 혹은 수축시키고 대부분의 건물을 자연적으로 무너지게 될 것이다.
만 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 일부 방사성 물질을 제외하고 지구상에 존재했던 인류 문명의 흔적은 철저히 사라진다.
하지만 지구의 45억 년의 역사에 대비해보면 만 년이란 시간은 그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지구는 인간이 없어도 계속해서 자전할 것이다. 인간 이전에도 생명은 있었고, 인간 이후에도 여전히 생명이 존재할 것이다.
하늘에 날개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지만, 난 이미 날았다.
왜 그랬어요?
Sniper-PK43의 전력이 재가동됐을 때, 그는 제일 먼저 이 질문을 내뱉었다.
응? 왜라니?
낯선 얼굴이 그의 모든 시선을 차지했다. 그는 시선 거리를 조절하여 상대방의 모습을 확인했다. 은색 운전복을 입은 낯선 소녀가 두 손으로 허리를 짚고, 그를 좌우로 훑어보고 있었다.
그의 기억 데이터는 전원이 꺼진 그 순간에 머물러 있었고, 자신이 눈앞의 소녀에 의해 재가동되었음을 깨달았다.
사교성이 좋은 듯한 소녀는 그의 머리에 쌓인 눈을 치워주었고, 무슨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그의 주변을 빙빙 돌았다.
고마워할 필요 없어. 남을 돕는 게 내 취미거든~ 널 어떻게 부르는 게 좋을까? 꼬마 저격수?
상대방이 혼잣말하는 동안, Sniper-PK43은 스스로 프로그램을 작동시켜 점검를 진행했고, 그 결과 각 기능은 정상이었다. 하지만 네트워크 연결을 할 수 없어 전원 차단 시간을 알 수 없었다.
제 모델은 Sniper-PK43 전자동 저격대입니다. 당신은 침식 증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헤헷, 그럼 천상천하 유아독존 나나미 님이라고 불러!
드디어 나나미가... "구구 육십일"이니까... 61일 만에 꼬마 저격수라는 대화 상대를 찾았어. 목소리는 이상한 아저씨 같지만 나나미는 신경 안 써~
제 이름은 "꼬마 저격수"가 아닙니다. 굳이 호칭이 필요하시면 저의 코드 "Sniper-PK43"으로 불러주십시오.
알겠어. 꼬마 저격수.
제 말을 완전히 무시하셨군요. 그리고 제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나나미의 목적? 음... 나나미도 잘 몰라~
나나미는 너랑 친구하고 싶어. 여기서 아주 오랫동안 걸어 다녔는데도 가는 곳곳마다 눈이 와서 아무도 못 봤어. 엄청 심심했단 말이야.
소녀의 말에 Sniper-PK43은 잠시 침묵했고, 폭풍이 휘몰아치는 소리가 둘이 있는 작은 옥상을 가득 채웠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하늘은 흩날리는 눈으로 뒤덮여 있었고, 육안으로는 5m 밖의 풍경도 볼 수 없었다. 멀지 않은 곳, 눈보라에 가려진 도시들만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제 전원이 꺼졌을 때와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Sniper-PK43이 이렇게 말하자, 나나미라는 소녀가 다시 물었다.
나나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줄 수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입니까?
Sniper-PK43이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소녀는 Sniper-PK43의 뒤쪽 케이스에 손을 얹고 가볍게 어루만졌다. 묘하게도 Sniper-PK43의 프로그램은 눈앞의 낯선 소녀에게 아무런 적대심도 없었다.
그 익숙한 동작은 Sniper-PK43 메모리의 어떤 부분을 갑자기 일깨웠다.
사실 언제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는지 그도 잘 모른다.
그때의 Sniper-PK43은 보육 구역 안의 건물에 있었고 그는 어느 인간 병사의 소유물이었다.
그 병사는 공중 정원의 정부군 소속이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공중 정원의 소유 재산이기도 했다. 그의 첫 가동은 이 옥상에서 진행됐다.
아! 아! 가동됐어! 정말 다행이다. 수리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시스템이 천천히 실행 및 가동되면서 청각과 시각이 순차적으로 활성화됐다.
그는 눈으로 보았다. 그 병사가 손으로 그의 기체 상단을 덮었고 마치 작은 동물을 대하듯이 쓰다듬어주었다.
M-T-0-8, 가동 완료. 명령을 말씀해 주세요.
다음은 발성 장치가 활성화됐다.
경장 시리즈에서 빼온 코어칩이라서 이 모델명을 자칭하는 건가? 아무튼 운행을 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고 모두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겠어.
병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찬바람의 냉기를 느껴 손을 움츠리며 바로 두꺼운 장갑을 다시 끼었다.
이름이 Sniper라고 했나? 후, 오늘부터 우리가 함께 이 구역을 감시해야 한다. 너의 임무는 이 경계에 침입하는 침식체 적군을 저격하는 것이다. 알겠나?
그가 가동된 그날부터 세상은 이미 끝없는 설원이었다.
그 후, 그는 옥상에서 병사 대신 밤낮으로 감시 임무를 수행하며 연중무휴로 근무했다.
병사는 가끔 위층에 올라가 정기 점검을 하기도 했다. 그는 업무와 관련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예를 들면: "그들은 공중 정원이라는 하늘 위 거점이 있고 그곳에 그가 존경하는 선배가 있다는 얘기. 한때 지구에는 사계절이 있었지만 현재는 겨울만 남게 됐다는 얘기. 그 이후부터 극한 추위가 점점 더 빨리 퍼져서인지, 최근에는 침식체가 줄어들었다는 얘기." 등 내용이었다.
Sniper, 소진 구역을 볼 수 있나?
병사는 어둠 속에서 그의 곁에 앉아 손가락을 들어 먼 곳을 가리켰다. 두꺼운 방호복을 입었지만 인간의 목소리가 추위에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진 구역"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그는 얼음으로 뒤덮인 도시만 보았다.
하하, 하긴... 그 재난은 엄청 끔찍했지. 그것이 보이는 곳은 전부 그 일부가 되었을 거야.
소진, 극한, 전쟁, 사계절... Sniper-PK43의 로컬 데이터베이스에 이런 내용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병사의 말을 통해 퍼즐 맞추듯이 그 사라진 이야기를 끼워 맞춰야 했다.
이후 간혹 보육 구역 밖을 돌아다니는 침식체를 제외하고는 오랫동안 적을 만나지 못했고 그와 병사는 점점 더 한가해졌다. 세상에 둘만 남은 것처럼, 온 세상은 그 옥상의 크기로 변했다.
병사가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계속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른 명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느 날 저녁, 병사가 다시 나타났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옥상으로 올라와 그의 곁에 꼭 붙어 앉았다. 그들이 위치한 옥상은 도시의 제일 높은 곳이었다.
새로운 명령을 내리시려는 겁니까?
뭐? 왜 그렇게 묻는 거지?
당신이 사라지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병사는 환하게 웃으며 Sniper-PK43을 마주한 채, 힘겹게 헬멧과 장갑을 벗고 눈보라 속에 얼굴을 노출시켰다.
극히 낮은 온도로 인해, 인간의 피부는 파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Sniper-PK43은 그때 그의 얼굴을 처음 봤다.
내가 너를 여기에 너무 오랫동안 내버려 뒀어. 미안하다.
Sniper-PK43은 그의 얼굴에 있던 물기가 얇은 얼음으로 맺혀지는 것을 보았다.
이 세상 최악의 모습을 보게 해서... 정말 미안해.
Sniper-PK43에게 한 말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눈빛은 알 수 없는 먼 곳을 향해 있었고, Sniper-PK43으로 하여금 그가 자신을 넘어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병사는 일어나 그를 처음 가동했을 때처럼, 맨손으로 그를 어루만졌다. 그는 인간의 불규칙적인 심장 박동과 떨림을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털어놓을 얘기가 있다면 제가 추가로 심야 경청 서비스를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뜻밖에도 병사는 그의 "농담"에 이번만큼은 웃지 않았다. 인간 병사는 그저 그를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그 선배도 떠났으니... 다들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곧 여기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정말 아쉬워...
병사는 그의 전원 버튼 위에 손을 올렸다.
이렇게 절망적인 장면을 더 이상 너에게 보여주기 싫어...
이... 해... 할 수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전원이 꺼지면서 변조되기 시작했다.
안녕, Sniper, 같이 있어줘서 고마웠어...
에너지 전송선이 몇 번 깜박이더니, 온몸 수백 군데에 있는 제동 포인트의 푸른빛이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완전히 쓸모없는 기계 부품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붉은 조각달 아래에서 인간 병사는 등을 돌렸다. 그는 마치 세차게 휘몰아치는 바람 속의 새처럼, 서슴없이 뛰어내렸다. 그것이 바로 시스템 종료 전, 그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왜 그랬어요?
그래서 그가 재가동됐을 때, 그의 중단된 메모리로 인해 여전히 그 순간에 머물러 있었다.
너도 이유를 몰랐던 거야?
나나미라는 소녀는 혼자 중얼거렸고, Sniper-PK43은 그제야 방금 자신의 메모리가 순식간에 읽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
나나미는 나나미야.
Sniper-PK43은 눈앞의 소녀가 인간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상대방의 정체를 판단할 수 없었다. Sniper-PK43이 어떠한 판단도 할 수 없을 때, 상대방은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갔다.
하지만 나나미의 출발지는 이런 곳이 아닌데... 나나미는 이렇게 큰 눈을 본 적이 없어! 극지의 눈도 이렇게 크진 않을걸! 나나미가 이동하면서 계속 눈사람을 만들었는데 이젠 그것도 지겨워. 게다가 나나미랑 눈싸움을 할 사람도 없어서 말이야.
당신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나나미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데. 아무튼 세계 여행을 하다가 만난 로봇 할머니가 날 여기로 데려왔어.
어쨌든 너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네... 그럼 나나미는 다음 목적지로 출발할 생각인데, 꼬마 저격수도 같이 갈래?
다음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나나미도 몰라!
이건 설득력이 너무 부족하지 않습니까? 전 어디도 가지 않겠습니다. 저의 임무는 여기서 주둔하는 겁니다. 저를 만든 제작자가 내린 명령입니다.
나나미는 알아, 사실 너는 제작자를 만나고 싶어 하잖아. 그럼 일단 너의 제작자를 찾는 걸 우리의 공동 목표로 정하자. 우리 둘이 함께라면 모두가 어디로 갔는지 확실히 알아낼 수 있을 거야.
소녀의 목소리는 경쾌한 새와 같았고, 그 안에 담긴 희망은 Sniper-PK43의 변하지 않는 프로그램 전기회로를 건드렸다.
인간을 찾으시려는 겁니까?
나나미는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꼭 알아낼 거야!
포기하십시오. 제가 여기에 오래 있었지만, 단 한 명의 인간도 본 적이 없습니다.
오래 있었다고? 얼마나?
어쨌든 오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제가 이곳에 주둔해서 이 도시의 안전을 지키는 겁니다.
"다들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곧 여기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그 인간 병사가 했던 말은 Sniper-PK43의 생각을 조금 흔들리게 했다.
왜 저를 위해 이런 일들을 하는 겁니까?
사실 나나미에게는 신비한 신분이 있거든. 그건 바로 길을 잃은 어린 양을 위해 소원을 들어주는 물의 신령이야.
그게 무슨...
Sniper-PK43은 난생처음 인간처럼 한숨을 내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가 받침대 밑의 가열원을 가동하자 기계구조의 틈새를 막고 있던 눈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그리고 받침대 밑에 접혀 있던 포대 지지대를 천천히 받쳐 올리자, 그의 몸에 내린 눈이 사르르 떨어졌다.
와...! 나나미의 신력이 꼬마 저격수도 일으켜 세울 수 있게 됐다는 말인가!
저는 처음부터 이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됐습니다. 저에게는 제작자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당신과 함께 출발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소녀는 두 팔을 벌리고 달려들어 Sniper-PK43의 총열에 다정스럽게 얼굴을 댔다.
좋아! 나나미와 꼬마 저격수의 탐험 시작!
마치 겨울에 맴도는 은색 물새가 날개를 퍼덕이며 은가루를 뿌리듯, 일종의 "계몽"이 설원을 따라 씨를 뿌리듯 촘촘히 떨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