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메인 스토리 / 15 절해성화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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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4 그녀의 깃발

도시가 침몰하려던 순간 폭풍우가 멈추었다.

멀리 바라보니 도시는 이미 자취를 감추었고 수평선은 다시 평온함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기지 외각을 둘러싼 여섯 개의 첨탑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점이 되었고, 가장 거대한 메인 도시도 전망대의 옥상만이 보일뿐이었다.

이때 폭풍이 몰아치고 거대한 파도가 밀려왔다.

베라는 한 손으로 깃대를 잡은 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사실 베라는 라미아만 제압할 생각이었지만, 일단 컨트롤 타워로 보내 침몰 명령을 해제하라고 시켰다.

라미아 그 틈을 타서 도망치고 말았다.

결국 남은 건 피곤함과 답답함뿐이었다.

정말 이상하다. 왜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지?——베라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무언가에 집착하는 건 참 오랜만이었지만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임무 목표를 무사히 지켰고 확보해야 할 것도 손에 넣었으니, 더 이상 쓸데없는 일에 힘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이유 같은 건 필요 없다. 그냥 하면 그만이다. 고고한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굳이 해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약탈자는 자신의 행동에 합리적인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다. 모든 건 본능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이때 멀리 하늘에서 모터 소리가 들려왔다.

겨우 고개를 든 베라의 시야에 검은 점이 나타났다. 그것의 정체는 수송기였다. 쿠로노의 추격자들이 아닌……

그것은 공중 정원의 수송기였다. 수송기의 날개에는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정말…… 너무 늦잖아.

아니, 그리 늦지는 않았어.

진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도시가 처음 침몰을 시작할 때처럼 땅과 하늘이 뒤흔들렸다.

Video: 여름 버전 떠오르는 수상도시

베라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지하기도 전에 도시는 급격하게 상승했다. 바닷물을 머금은 도시는 하늘의 빛 아래에서 반짝였다.

지금 이 순간 이 도시는 더 이상 바다 위의 묘비가 아니었다.

바닷물이 도시에 덮인 죽음의 기운을 모두 씻어냈다. 지금 햇살 아래에 우뚝 선 이 도시는 인류 문명을 이끄는 등대의 모습 그대로였다.

베라는 두 눈을 감았다.

언젠가 시간을 측정하는 기준에 대해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우주는 138억 년 전에 탄생했다. 그것을 인간의 계산법대로 12개월로 나눈다면 인간의 역사는 12월 마지막 밤부터 시작된다.

마지막 밤, 약 350만 년 전에 첫 번째 고릴라는 일어나 땅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닌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을 택했다.

별의 움직임으로 시간의 변화를 유추하던 때로부터 첫 우주비행사가 달에 깃발을 꽂았을 때까지도 겨우 60초에 불과했다.

현재 인간이 마주한 시련——퍼니싱의 폭발 또한 거대한 우주의 개념으로 보면 찰나의 순간에 불과할 것이다.

베라는 밝은 빛 속에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눈을 뜨고 태양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빛속에서 베라의 눈앞에 그 여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베라는 그림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다음 순간의 세상이 바로 앞에 있는 것 같았다.

아폴로 11호의 우주비행사가 달에 깃발을 꽂았듯이 베라는 기창을 바닥에 힘껏 내리꽂았다.

이것은 영역 선포의 의미이자 핏속에 흐르는 야성의 본능이었다.

비행선이 트랙에 진입하고 우리는 지구가 우리에게 약탈되었음을 선포했다.

깃발이 달 표면에 꽂히고 우리는 달이 우리에게 약탈되었음을 선포했다.

인류는 약탈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달을 정복한 지 수백 년이 흐른 오늘, 공중 정원에서 온 인류가——

다시 지구를 "정복"했다.

Video: 여름 버전 깃발을 꽂는 베라

그리고 이것은 내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다. 사실 이 부분은 메시지에 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좋은 추측은 명확한 결론 못지않게 가치가 있는 법.

아쉽지만 이 결론을 검증할 시간이 없는 듯하니, 이 자료를 훗날 이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남긴다.

어쩌면 너희들의 연구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난 퍼니싱의 "합리성"에 대해 고민해 봤다. 영점 원자로가 아무 이유 없이 퍼니싱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물리적 기초는 없다.

자연계의 모든 생물은 생태계에서 존재의 필요성과 합리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다.

양떼들은 풀의 수를 통제하고 맹수들은 양의 수를 통제한다.

그럼 퍼니싱은? 퍼니싱은 무슨 역할을 한 것일까?

지금 이 시점에서 볼 때 진공 영점 원자로 기술은 퍼니싱 출현의 중요한 조건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난 영점 원자로 자체가 퍼니싱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점 원자로는 새로운 통로를 열어주었을 뿐이다.

영점 원자로는 고도로 발달된 물리와 수학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퍼니싱은 첨단 전자 설비에 유난히 더 강한 침식력을 보였다.

원시 문명은 퍼니싱을 마주할 기회가 없었다. 퍼니싱은 난로나 증기기관 속에서 생성될 수 없다.

퍼니싱이 나타났다 해도 전기, 전자기술을 발명하기 전이었으니 그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이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추론은 간단하다. 퍼니싱은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제어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문명에 기생하며 통제하는 존재이다. 병든 문명이 스스로를 치유할 수 없다면 그 문명에 남은 건 멸망뿐이다.

그렇다. 결국 내가 얻은 결론은 너무나 진부했다.

물론 실질적인 증거는 찾지 못했고 퍼니싱에 침식된 문명도 발견하지 못했다. 유일한 연구 샘플은 인간뿐이었다.

어쩌면 너희들은 더 먼 곳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르니, 이 추론이 도움이 되기를 바라본다.

낮이 가고 밤이 왔다면 언젠가 여명도 밝는 법이다.

우리 대신 여명이 밝아오는 것을 증명해 주길 바란다.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우리가 잘못된 일을 한 거라면 그 오류는 아마 우리 스스로의 연약함일 것이다.

생물의 본능은 번식이요. 문명의 본능은 확장이다.

200만년 전에 원숭이가 처음 나무에서 내려오던 그 순간부터 인간은 먹이사슬의 최상단을 향해 쉼없이 올라갔다.

우리는 두 손과 치아를 이용해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다음은 불과 창으로.

증기기관, 내연기관, 발전기관, 컴퓨터……

드디어 먹이사슬의 끝에 오른 인류는 더 높은 우주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동물의 피와 살, 자연의 자원, 태양, 바람, 조석의 에너지를 약탈했다. 문명을 위한 인간의 탐욕은 한없이 거대해졌다.

우리는 더 나아가기 위해 공중 정원을 건설했고, 우주선을 만들기 위해 이전의 산업혁명보다 더 강력한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태양을 넘어 진공 영점 원자로를 통제하려 했다.

비록 우리가 쌓은 모든 것들이 그로 인해 사라졌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그저 정복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젖어있었을 뿐.

이것이 바로 내 마지막 활동 일지다. 미래에 이 메시지를 확인하는 인간에게.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 뒤돌아보지 말고, 멈추지 말고 후회하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

순수히 밤을 받아들이지 말아라.

저무는 하루에 소리치고 저항하라.

분노하고 분노하라. 사라져가는 빛을 향해.

——라스트리스의 마지막 활동 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