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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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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 영점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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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라를 따라 수많은 실험실을 파괴한 후 드디어 해상 도시의 가장 깊은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은 밀폐 조치가 아주 잘되어 있었지만 일부 문은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파괴되었는지 바닷물이 내부로 흘러들었다.

하지만 마지막 밀폐 방어선을 넘지 못하고 바닷물은 전부 사라졌다.

영점 원자로의 윤곽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자 마치 금속으로 만들어진 해저 산맥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산맥 사이의 깊은 협곡을 걷고 있었다.

끝없는 어둠 위, 광활한 하늘색 빛이 우리를 비추었다.

그것은 아틀란티스 기지를 감싸고 있는 바다였다. 그리고 지금 그 바다는 마치 거대한 하늘처럼 원자로를 둘러싸고 있었다.

원자로와 무거운 바닷물을 갈라놓은 건 단단하고 투명한 유리였다.

유리는 무에 가까울 정도로 맑고 투명했으며 가만히 보고 있으면 바닷물이 벽을 만들어 멈춰있는 것 같은 착각을 주기도 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원자로 부품은 첨단 과학기술의 산물이 아닌 오래된 유적이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능묘에 더 가까워 보였다.

묻혀 있는 것은 황금시대의 빛나고 차가운 꿈이다. 다시 깨어날 수 없는 그 시절도 마찬가지로 조용히 매장되어 있다.

이 사람들은 왜 이런 걸 바다 밑에 지은 걸까?

난 베라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플라톤의 아틀란티스가 대서양에 침몰했다. 하지만 후세 사람들은 아틀란티스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라 말했다.

이 원자로도 그런 존재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건설자들은 처음부터 실패 준비를 해두었던 것이다.

원자로가 제어 불가 상태에 돌입하면 대서양으로 이 기지를 덮어버릴 계획이었다. 거대한 파도가 결국 무한한 바다에 잠식되어 거품으로 사라지듯 말이다.

참 웃기는군. 애초부터 실패할 경우도 대비해 두었으면서 왜 멈추지 않았던 거지?

자신에게 과분한 힘을 제어하려고 하니까 이런 꼴이 난 거야.

두 사람의 앞길에 푸른 빛에 비친 빙산같은 원자로가 있다. 마치 세계에서 가장 황량한 땅, 남극을 거닐고 있는 것 같다.

이때 베라가 갑자기 손을 들더니 내 앞을 막아섰다.

쉿——

누군가 우리 앞을 스쳐지났다.

지금까지 어둠속에 숨어서 해상 도시를 침몰하게 만든 자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베라와 나는 윤곽을 통해 상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저건…… 롤랑과 함께 있던 승격자잖아.

베라가 바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혼자 원자로 중앙에 서 있는 라미아의 상태가 뭔가 이상했다. 나와 베라가 가까이 가는 것조차 느끼지 못한 눈치였다.

베라의 창이 그녀에게 닿으려는 순간 그제야 라미아는 꿈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린 듯했다.

라미아

윽……으아악……

가까이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

그녀는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전에 몇번이나 그녀와 싸운 적이 있다. 그래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라미아의 정신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승격자도 영점 원자로의 자료를 찾고 있는 거야?

라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베라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베라는 그녀가 침묵으로 묵인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바로 돌진했다.

라미아는 미처 공격을 피하지 못했고 날카로운 창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렸다. 그녀는 분노와 공포로 가득한 눈으로 베라를 노려보았는데 그 모습은 마치 영역을 침범당한 들개와도 같았다.

라미아

여기서 도망쳐…… 오지 마…… 오지 마……!

처음에 라미아는 반격을 시도했다.

그녀의 눈은 곧 절망으로 가득 찼다.

그녀의 눈동자에 마지막으로 남은 건 광기에 가까운 원한뿐이었다.

단 몇 분안에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변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라미아

침몰해……침몰해…… 전부 라미아와 함께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거야.

그녀가 뒤로 한 발 물러서자 공간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난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은신 후 도망치려는 징조였다.

베라는 혀를 차더니 손에 들고 있던 기창을 라미아를 향해 던졌다.

기창은 라미아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창은 라미아의 허상을 관통해 벽에 박히고 말았다.

라미아는 그렇게 바로 우리 눈앞에서 사라졌다.

주위가 적막에 잠기고 베라는 미간을 찌푸린 채 벽에 꽂힌 기창을 뽑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어떻게 승격자가 이곳의 좌표를 알고 있는 거지?

이곳의 좌표는 절대 기밀이라고 의장이 말했잖아. 어떻게 저런 "조무래기"도 알고 있는 거냐고.

쯧, 일단 저쪽은 신경 쓰지 말아야겠어.

베라와 난 부랴부랴 중앙 제어 플랫폼으로 달려갔다.

……

지금 조작 설명서를 봐도 늦지 않겠지?

중앙 제어 시스템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다. 이런 장치의 내핵은 거의 같은 원리로 작동된다. 한가할 때 리에게 배운 것이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생체 정보 인증 실패, 조작할 수 없습니다.

스크린에 뜬 접속 실패라는 문구는 희망을 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도시는 점점 더 침몰하기 시작했고 수심을 가리키는 수치가 계속 상승하기 시작했다. 모든 지령은 "지속 침몰"이라는 명령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것도 역시 예상했던 결과야.

젠장, 저 자식은 왜 이곳의 중앙 제어 시스템을 제어할 수 있는 건데?

베라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스크린에 또 다른 화면이 나타났다.

회의 기록 영상이었다.

한 사람씩 보고를 진행한다. 통신 부장부터 시작해.

모든 통신이 차단되었습니다. 저희 설비 문제가 아닌 중계기와 수신기 쪽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중계기가 왜?

위성과 지상의 서버에서 아무런 응답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는 지상 및 위성 통신 모두 마비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우리 기지를 제외한 모든 인류 문명이 멸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보다 조금 나은 가설이 있나?

240개 위성과 연계된 아시아, 유럽, 북아메리카 서버가 동시에 다운되었을 수 있습니다. 지금 긴급 보수 중이라면 우리와 연락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라스트리스는 웃지 않았다.

그 가설이 발생할 확률은 얼마나 되지?

통신 부장도 웃지 않았다.

10의 마이너스 17제곱입니다. 회의 전 두 번이나 계산해 얻은 수치입니다.

알겠다. 그럼 인류 문명이 모두 멸망했다는 가설을 따르는 게 좋겠군.

그녀는 아주 간단하게 모든 걸 정리한 뒤 행정 부장을 바라보았다.

기지 내 상황은 어떤가?

각 부서 사이의 내부 네트워크는 아주 안정적입니다. 모든 연구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움직이고 있고 기지는 여전히 질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설비는?

자가 점검 프로그램은 별문제 없습니다.

각 부서의 기계들도 전부 정상입니다.

남은 자원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라스트리스가 가장 먼 곳에 앉은 후방 지원 부장을 바라보았다.

대륙의 보급이 중단된 이상 앞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최대 15개월입니다.

근거는?

기지 인원의 체중에 따라 1인당 하루에 섭취해야 할 최저 칼로리를 계산했고, 이를 근거로 기지에 저장된 식량의 총 칼로리를 나누어 산출한 수치입니다.

아직 정확한 수치는 아닙니다. 시간을 더 주시면 더 정확한 결과를 보고드리겠습니다.

폭발한 원자로 환경을 재현하려면 적어도 21개월은 필요해. 그래야 그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어.

라스트리스는 잠깐 고민에 잠겼다.

기지 인원을 줄이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지?

라스트리스가 고개를 들어 후방 지원 부장에게 물었다.

후방 지원 부장이 흠칫하더니 바로 대답했다.

기타 부서의 식량을 전부 차단하고 실험부에 집중시킨다면 최대 23개월까지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럼 연구를 끝낼 수 있습니다.

잠깐만요. 제가 한 마디 하겠습니다.

말해.

전 이 방안에 반대입니다.

이유는?

프로그램과 로봇이 고장나듯이 인간도 영양소가 따라가지 않으면 질병에 감염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연구 진척도 더 느려지게 됩니다.

게다가 통신부는 지금 생존 가능성이 있는 개인 또는 조직과 연락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만약 외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연구를 더 효율적으로 진행하려면 각 부서를 기여도에 따라 순서에 매겨야 합니다. 가장 불필요한 부서의 식량을 먼저 차단하고 실험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최대한 보장하는 겁니다.

찬성이야.

라스트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부터 순서를 배정한다. 행정부부터 배급을 중단하고 그 다음은 후방 지원부, 의료, 통신, 로봇, 데이터 마지막으로 실험부 순서로 진행한다.

그녀는 책상 앞에 앉은 부장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다 마지막으로 그녀 스스로를 가리켰다.

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

회의실은 몇 초 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행정 부장이 책상 앞에 펼쳐진 파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결의안은 통과된 것 같군요. 지금 바로 직원들에게 알리겠습니다.

회의 기록 영상이 종료되고 화면이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곧 라스트리스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 기록을 보게 될 인간에게. 난 라스트리스 이곳의 연구 팀장이다.

이 기록의 권한은 전부 공개로 설정한다. 중앙 제어 시스템에 접속하려는 자는 누구든 이 기록을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이다. 놓치는 일이 없도록 자동 재생 모드를 설정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단체" 회의를 서두에 두었다. 기본적인 이해능력이 있는 인간이라면 회의 기록을 통해 기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으리라 믿는다.

이 기록을 보고 있는 이들은 지능을 가진 같은 인류라 믿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지금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퍼니싱 재앙이 폭발한 뒤로 기지는 봉쇄되었고 그리니치 표준 시간법을 버린 뒤 기지 자체의 시간 시스템으로 기록을 진행하고 있다.

날짜와 달은 오류가 있을지 모르지만 연도는 아마 정확할 것으로 예상된다. 퍼니싱이 폭발한 지도 어느새 3년째다.

기지 내 식량은 전부 소진되었고 더 이상 외부의 지원도 바랄 수 없다. 지금으로서 가장 합리적인 추론은 본 기지를 제외한 모든 인류 문명이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난 역사 기록에 별로 재능이 없는 사람이지만 이곳으로 와서 이 기록을 찾는 사람이라면 분명 무언가를 얻기 위해 왔을텐데. 동족으로서 너희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킬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부터 그날 회의가 끝난 뒤 기지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에 대해 설명해 주겠다.

기지에 봉쇄령이 내려진 순간부터 우린 전시 자원 배급 계획을 가동했다. 계획은 아주 훌륭하게 수행되었고 한정적인 물자로 꽤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다.

음식이 부족해지기 시작하자 우리에게는 암묵적인 규칙이 생겼다. 그것은 연구 인원들이 우선적으로 보급품을 받고 다른 부서들은 연구에 대한 기여도에 따라 배급을 받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둘씩 죽어갔다.

가장 먼저 식량 배급이 중단된 건 행정부였다. 이제 우리의 보고를 들을 상부 따위는 없으니까.

우리 섬은 이런 상황을 예상범위에 넣지 않고 디자인되었으므로 시체 처리 시설이 장착되어 있지 않았다. 시체가 누적되어 세균이 생성되는 걸 막기 위해 우린 희생자들을 바다에 묻었다.

그 다음으로 식량 배급이 중단된 건 후방 지원부였다. 그뒤로 난 매일 창고와 사무실을 오가는 데 25분을 추가로 소모해야 했다. 통조림과 압축 비스킷도 직접 챙겨야 했고 파일과 문건, 기타 잡무도 전부 내가 직접 처리해야 했다.

그 다음은 의료부였다. 그들은 죽기 전 의료 사용 가이드를 최대한 상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남은 이들은 그들의 숭고한 희생에 감격했다.

그 다음은 통신부였다. 그들은 끊임없이 외부와의 연략을 회복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가워졌다. 마치 인간의 껍데기를 쓰고 있는 로봇처럼 보이기도 했다.

기계부. 이제 로봇 엔지니어들이 없으니 연구 결과를 얻기 전 설비에 큰 고장이 생기질 않길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데이터부. 역시 마찬가지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까지 죽었으니 서버와 데이터베이스에 문제가 생기지 않길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실험부. 가장 핵심적인 부서이자 내가 직접 관리하는 부서다. 희생될 순서에 따라 리스트를 작성했다. 난 이 기지의 관리자라는 이유로 마지막에 배치되었다.

아, 부서에 소속되지 않은 인원... 예를 들면, 아이의 단식 순서는 중간에 배치했다. 아이는 식량을 얼마 소모하지 않는다는 것과 도덕적인 이유로 난 그녀를 가장 처음에 배치하지 않았다.

인류애가 강한 동료들의 반발로 인해 불필요한 충돌이 생기고 실험 진척이 늦춰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내가 직접 영상 기록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까지 이런 잡무는 내가 직접 할 필요가 없었다.

퍼니싱 재앙이 일어난 뒤 본 기지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에 대한 설명은 여기까지 하겠다. 데이터부의 서버가 파괴되지 않고 아직 그대로라면 지난 3년 동안 우리의 행적을 담은 일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우리가 얻은 성과에 대해 얘기하겠다.

진공 영점 원자로는 최고 기밀 사항이다. 너희들이 이 영상을 보고 있다면 기지에 진공 영점 원자로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기지가 봉쇄된 후 우린 퍼니싱이 생성된 이유를 밝히기 위해 이곳에서 1호 원자로에서 나타났던 고장을 다시 재현하려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는 실패했다. 1호 원자로의 마지막 일지에 적힌 절차대로 사고 원자로와 굉장히 흡사한 환경을 만들어냈지만 퍼니싱은 생성되지 않았다.

수정한다. "나타나지 않은 게" 아니라 "나타났지만 관측이 어렵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이 영상을 보는 사람이 누구이고 전문지식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으니 최대한 쉽게 설명하도록 하겠다.

1호 원자로와 세계에서 받은 보고를 토대로 우린 퍼니싱이 생성되었을 때 어떤 물리 반응이 발생했었는지 측정했다. 본 기지 실험에서는 퍼니싱이 관측되지 않았고 설비는 일어나는 물리 반응을 전부 기록했을 뿐이었다.

퍼니싱은 나타난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사라졌다. 마치 굉장히 빠르게 떨어지는 빗방울과도 같다. 너무 빠른 속도로 우린 그것이 물에 떨어지고 일으킨 파장 정도만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무언가에 의해 "흡수"된 것이다.

우리에게 2년 정도만 더 버틸 수 있는 식량이 남아있었다면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내 부하들은 전부 죽어버렸고 방금 전 나도 마지막 압축 비스킷을 먹었다.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물방울을 찾을 수 없었지만 그것이 떨어진 수면은 찾아낸 것이다.

퍼니싱을 흡수하는 "수면"에 관한 정보를 설명하려면 굉장히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난 이 기술에 "‘Ω 파일"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난 이것을 내 호주머니 안에 넣어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영상 녹화를 마친 뒤 이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전망대로 향할 것이다.

이제 나에게는 더 이상 실험을 진행할 수 있는 샘플도 설비도 없어 "‘Ω 파일"이 본 기지 이외에도 퍼니싱에 작용할지는 알 수 없다.

차가운 "로봇"의 눈빛에 순간 따뜻함이 스쳤고 그 표정은 곧 담담한 슬픔으로 바뀌었다.

난 당신들과 직접 만날 수 없겠지만 여기까지 온 당신들이라면 이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해냈다. 당신들도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하길 바란다.

우리의 유산을 가지고 떠나라.

라스트리스가 한숨을 쉬었다.

사실 이 영상에 이런 말은 남기지 않으려 했다. 지나치게 감정적인 발언은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 마지막으로 이기적으로 행동할 권리 정도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날 회의가 끝나고 우리 중에도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다른 멤버들도 결국 답은 똑같았다. 우리가 한 일은 모두 옳다고.

확실히 이 세상을 파괴한 퍼니싱이 1호 원자로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기지에 있는 연구원들의 신념과 실험을 계속해야 한다는 결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린 우리의 사명을 끝까지 완수했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가 정확한 선택을 했다고 믿는다.

설령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우린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1호 원자로에서 희생된 동료들도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녀는 두 눈을 감았다.

다만 아쉬운 게 하나 있다면 그들도 나도 여기까지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상을 보는 인류들은 이 사실을 명심하길 바란다——별이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의 설레임과 계속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잊지 마라.

우리가 지금 약탈당하는 쪽이라고 해서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약탈하고 정복해라. 넘어진다 해도 다시 일어서서 다시 약탈해라.

나는 인류가 언젠가 다시 밝은 미래를 맞이할 것이라 믿는다.

여러분들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겠습니다.

이제 나도 내 동료들을 만나러 가야 할 것 같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