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고난을 겪었고, 수많은 생사와 이별을 목격했지만, 영웅은 여전히 가장 험난한 길에서 희망을 찾아간다.
그것은 결코 환락과 축복으로 가득한 여행이 아니지만, 대부분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들이 출발하는 순간부터 죽음에 이를 때까지 어둠과 얽히고 싸워야만 했다.
거짓으로 얼룩진 파일을 펼쳐봐도 영웅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우린 아무것도 몰랐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
루시아는 무언가를 생각하며 손끝으로 스크린을 스쳤고, 전투 기록은 지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폐허에 멈춰져 있었다.
그 무너진 벽 사이에 누군가가 붙인 합성지가 있었는데, 그 위엔 이름 모를 소설의 한 구절이 인쇄되어 있었다.
(가장 험난한 길...)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075호 지하 도시 임무와 필드 포인트 설치 임무를 완료하고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다.
루시아는 대기실에 남아 교습용 전투 기록을 둘러보고 있었다. 새로운 임무가 오기 전까지, 작전 대기실에 남아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휴식은 반갑지만 다들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대원들만 대기실에 남겨져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이 분명했다.
(지휘관님의 군령 위반에 대해 당분간 추궁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건, 지금 더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사항이 있기 때문일 거야...)
지휘관은 다른 임무를 신청하려 시도를 해봤고, 또 평소에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문의도 해봤지만, 어떤 행동을 취하든 돌아오는 대답은 유사했다. 모두 '며칠 쉬고 보자'라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했지만, 막상 소대 전원이 함께 외출하면 주변엔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광장에서 의도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도, 때마침 그들이 지나가는 길에 카메라를 줌인한 기계도 한 가지 사실을 소리 없이 말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 시선의 "우리"에 갇혀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휘관은 상황을 파악한 다음 모두를 대기실로 돌려보냈다.
원래 익숙한 장소에서 현재 상황을 의논하고자 했는데, 돌아와보니 대기실에 있던 비축 무장들도 외출한 사이에 모두 사라졌고, 일상 장비와 생활용품만 조금 남아 있었다.
담당 직원에게 대기실 안의 상황을 문의하려 했을 때, 그들은 지휘관을 연행했고 지금까지 돌려보내지 않았다.
(꼬박 이틀이 다 되어가는데...)
루시아는 단말기 스크린 하단을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마인드 표식 오염 때문에 기억이 반복 재생될 가능성이 있어 격리 간호가 필요합니다."
지휘관을 연행할 때, 낯선 직원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다.
지휘관을 따라가거나 멀리서 지켜보려고 했지만, 그녀가 입을 열자 상대방은 마치 준비라도 한 듯, 일련의 조사 보고서와 작업 증명을 제출했고, 게다가 암묵적인 조항과 경고를 쏟아냈다.
낯선 직원들이 떠난 뒤, 리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방금 그들이 보여준 검사 보고서를 확인했죠?
네...
조작한 내용은 아니라서 차마 부정할 수는 없었어요.
단지... 일어날 수 있는 위험 증상들을 추가로 강조했어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증상에 대해 치료할 필요는 없지만, 간호해야 하는 이유로는 충분해요.
제가 토론하고자 하는 건 보고서 내용이 아니라, 그 보고서에 사인한 담당 의사... 히사카와입니다.
사인할 때 성씨를 생략했지만, 전 과거 자료에서 이 의사의 필체를 본 적이 있거든요.
히사카와는 "대철수 시기" 때부터 쿠로노 그룹의 의사였습니다.
현재 쿠로노가 공중 정원에 자리를 잡았으니, 더 이상 이 이름을 대놓고 강조하지는 않겠죠.
하지만 그들의 인맥 관계는 여전히 견고하고, 계속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담당 의사를 배정할 때 생긴 우연이 아닐까요?
만약 그랬다면 지휘관님을 데려간 직원 중에 최소 한두 명은 낯익은 사람이었겠죠?
무엇보다 의심스러운 건... 이런 일이 발생했음에도 의장님과 세리카는 침묵을 지키고 있잖아요.
분명 어떤 제약을 받아서 당분간은 쉽게 나설 수 없는 모양입니다.
그 말인즉 지금 상황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루시아는 텅 빈 대기실을 둘러보며, 마음속의 의심을 억누르고 눈길을 다시 그 노란 합성지로 돌렸다.
(어쩌면 우린 아무것도 몰랐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 문구를 곱씹으며, 그전에 의식의 바다에서 알파와의 전투를 떠올렸다.
그때 지휘관님은 믿음을 선택했다...
그렇게 그녀는 의식의 바다가 융합하는 가운데 알파의 단편적인 기억을 보게 됐다.
그리고 감춰졌던 기억과 진실을 만났다.
(진실?)
기억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상자를 열었다고 해서 그것이 사건의 전부라고 단언할 수 없다.
누구든 이런 경험을 겪기 마련이다.
상대방과 나눈 대화를 뚜렷하게 떠올릴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의 속마음과 말 뒤에 숨겨진 진실은 엿볼 수 없다.
모든 기억을 주워 모았지만 미지의 사건들은 두터운 눈에 덮인 것만 같았다.
그녀는 여전히 모든 진실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알파의 말을 생각해 보면...
나도 그렇고 루나도 마찬가지야. 승격 네트워크에 의해 선정됐을 때, 일어났던 그 일들은 출발점에 불과하지.
(출발점이라...)
루시아는 묵묵히 이 단어를 곱씹으며 알파가 의식의 바다에 남긴 기억 조각들을 회상했다. 그녀는 이 정보들과 의식의 바닷속의 기억을 함께 정리하려고 애썼다.
(구조체가 됐을 때, 루나가 이미 죽은 줄 알았어.)
그녀는 스크린에 적힌 메모 페이지를 열고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몇 개의 키워드를 적었다.
(그러다 얼마 전에서야 루나가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됐지. 알파가 승격자로 변하고, 그녀 곁에 있다는 건...)
루시아는 잠시 생각을 끊고, 페이지에 "어쩌면 알파가 심각하게 침식을 당한 상태에서 루나에게 발견되어 승격자가 됐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적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던 "나"라면... 단지 증오나 힘을 얻기 위해 승격자가 된 건 절대 아닐 텐데.)
(공중 정원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루나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일까?)
(그 외에도 가능성이 많긴 하지만 "나"를 그 길로 가게 한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야.)
(그때의 "나"는 이 길이 미래라고 믿었기 때문에, 승격자가 되는 것을 선택했을 거야.)
(더구나 그런 심각한 침식 상태에서 승격자가 되지 않으면 침식체로 타락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녀는 많은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나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 게 분명해.)
(그녀는 그게 출발점이라고 했으니... 그 이후에 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루시아는 의식의 바다에서 얻은 소량의 정보를 뒤지며 알파가 동료의 목소리를 찾던 때를 회상했다.
(무롤과 진... 그리고 헤론...)
이 기억을 되찾기 전, 그녀는 기억 속의 위화감 때문에 세 동료의 행방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전사자 명부에 기록되어 있었고, '침식체와 전투 중 전사'라고 냉랭하게 적혀있었다.
그 사건은 밑도 끝도 없이 끝나버렸고, 어떤 실마리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한창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리브는 문득 무거운 표정을 보이며 손끝으로 오른쪽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브의 흔치 않은 행동을 본 루시아는 이내 조용히 스크린을 넘겼고, 재생되는 전투 튜토리얼로 자신의 메모를 덮었다. 리는 고개를 숙이고 손에 쥔 물건에 집중하는 척했지만, 사실 대문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벌써 17번째였다. 그들이 경계하고 있는 걸 눈치챘는지 그 녀석들은 방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어제 지휘관이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발신인 불명인 암호화 메시지가 리의 단말기로 송부됐다.
"언행 주의.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날이 밝으면 방을 체크하도록."
이 메시지를 받았을 때 의심이 가긴 했지만, 그전의 일을 겪어본 당사자로써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침이 되자 모두 협력해서 "방 청소"를 했다. 그러던 중 침입자들이 남긴 "눈"을 발견했고, 이 메시지에 대한 일부 의혹도 사라졌다.
리는 묵묵히 사물함 몇 개를 특정 구석으로 옮겼고, 리브는 지휘관의 예비 외투를 평소에 걸지 않았던 곳에 걸었다.
그런 "선물"들이 숨겨진 곳을 가려진 뒤부터일까, 대기실 문 앞엔 종적을 감추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대 대원들은 목소리를 낮추어 의논한 뒤, 당분간 어떤 행동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대기실에 남아 여유로워 보이는 "휴식"을 취하며 감시로 인한 잠재적인 불확실성을 피해 지휘관이 안전하게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다.
"어쩌면 우린 아무것도 몰랐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대체 어떤 이유로 인해 이런 상황이 된 걸까?)
(지휘관님이 지난 임무에서 군령을 위반해서 이러는 걸까? 하지만 그들은 당분간 추궁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냥 시간 끌기를 위한 핑계인 건가?)
(아니면 우리가 일부러 루나를 놓치고 그녀의 행방을 숨겼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다. 설령 하산과 니콜라가 전황이 초조한 시기에 이런 일을 처리했다고 해도 이보다 더 정당한 수단을 취했을 것이다.
적어도 체포 영장을 발부했어야 하고, 단지 격리 간호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지휘관을 데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건이 발생한 뒤로 지금까지 그들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어쩌면 리가 말한 것처럼 그들이 보이지 않은 관계망이라는 그물에 갇혀 있다면, 대기실에 있는 그레이 레이븐보다 훨씬 신중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저 쿠로노라는 "그물"은 도대체 지휘관으로부터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
나도 그렇고 루나도 마찬가지야. 승격 네트워크에 의해 선정됐을 때, 일어났던 그 일들은 출발점에 불과하지.
(지금 우리도... 그런 출발점에 서 있는 것일까?)
(알파...)
갑자기 복도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문 밖의 알 수 없는 "순찰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문을 사이에 둔 탓에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머레이?)
루시아는 고개를 돌려 마침 미간을 잔뜩 찌푸린 리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판단이 옳다는 걸 확신했다.
(머레이가 문밖의 사람과 인사를 하고 있어... 서로 아는 사이인가?)
루시아는 의문을 품고 자신의 청각 모듈의 수신도를 조금 높였다.
아~ 이런 우연이, 여러분들이 오늘 이곳에 온 건... 크흠,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문 밖의 상태가 보이진 않았지만 상대방이 말을 많이 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그의 장난기 어린 말투가 들렸다.
(저런 말투를 사용하는 걸 보니... 지금 문밖에 있는 사람은 고위층이 아닌,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 같은데.)
그녀의 판단은 머레이 개인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 것이 아닌 직위에 대한 인식에서 나온 판단이었다.
루시아는 문 밖의 대화를 귀담아들으며 가벼운 농담에서 실마리를 찾으려 했다.
죄송해요, 제가 통화하는데 방해가 됐나요? 지금 보니까...
아~ 무슨 상황이 생기면 보고한다는 말이죠. 아니요, 별거 아닙니다, 혹시나 일에 방해된 건 아닌지 싶어서요...
(역시 정찰병이었어.)
상대방은 목소리를 낮춰 머레이에게 높은 수신도의 청각 모듈로도 잘 들리지 않는 대답을 했다. 아마 립싱크나 수화일 가능성이 높았다.
당연하죠~ 제가 귀찮게 하지 않았다면 참 다행이네요. 요즘 늦게까지 일하는 거 같던데 휴가는 언제 가나요?
문밖의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대답했고 머레이는 온화하고 예의 바른 웃음소리를 냈다.
결과를 찾기 전까지 휴식할 수도 없다니, 참 고생이 많으시네요.
(결과? 그럼 지속적인 감시와 순찰 임무가 아니라, 뭔가를 찾고 있는 건가?)
그래요, 임무에 대해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을게요. 그럼 차라도 한잔할까요? 당신이 좋아하는 카페가 영업을 다시 시작했더라고요.
(좋아하는 카페? 상대방은 인간일 가능성이 크겠군.)
아, 히사카와 씨는 오늘 휴가인가요? 연락해서 같이 갈까요?
대기실에 있던 세 대원은 그 이름을 듣고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쿠로노 관계자가 그레이 레이븐 대기실의 문 앞을 배회하며 어떤 결과를 찾고 있었다.
대원들은 그전에도 현상황에 대해 추측을 해본 적이 있었다. 지난 임무 때 군령을 위반한 것, 제멋대로 루나와 연결을 한 것, 심지어 마인드 표식 오염 때문에 더 심각한 증상이 일어난게 아닌가 등 여러 방면으로 추측을 했었다.
그렇지만 지금 접수한 정보를 봤을 때, 그들은 최악의 결과에 가장 가까웠다.
그건 마치 오랫동안 축적된 음모가 곧 쏟아져 나오려는 것만 같았다.
머레이는 귀에 딱 들릴 정도의 적절한 음량과 적당한 일상 대화로 상대방의 세부 정보를 세 대원에게 전달한 다음,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더 이상 낯선 정보 데이터가 검측되지 않자, 리브는 그제야 테이블에서 손을 떼었고, 나머지 두 대원도 그녀의 신호를 접수한 다음 스스로 긴장을 풀었다.
방금 전까지 그레이 레이븐의 대기실에서 이런 전술을 동원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루시아는 고개를 살며시 흔들며 스크린에 시선을 돌렸다.
...
그녀는 손으로 스크린 옆을 가린 뒤 단말기에서 숨겨진 자료를 열었다.
그녀가 기억의 위화감을 눈치챘을 때, 서둘러 조사한 기록과 자료들이었는데, 그때는 암호화 때문에 극히 일부 정보만 볼 수 있었다.
기억을 되찾고 공중 정원으로 돌아온 루시아는 리에게 그때 조사한 자료를 조용히 자신의 단말기에 복사해 달라고 부탁했다.
리는 엄격한 감시를 뚫고, 급급히 파일의 일부를 해독했다.
해독을 통해 그녀는 사망자 자료를 한 부 얻었다. 하지만 그 주의 사상자가 평소보다 몇 배나 많았던 것 말고는 무롤과 진을 포함해 기록상 별다른 이상이 보이지 않았다.
루시아는 의식의 바다에서 되찾은 기억을 자세히 더듬었다.
그녀는 기억에서 희생된 병사 동료의 이름을 눈앞의 명단과 하나하나 대조했다.
기억 속의 모든 이름이 등록돼 있었지만 그들 모두에게 정확한 전사 사유가 있었다.
하지만 익숙한 이름 외에도 그녀의 기억 속에 나타나지 않은 낯선 사람들이 같은 시간대에 기록되어 있었다.
이건...
그건 다섯 명의 지휘관과 그의 소대 그리고 수십 명의 연구원들의 이름이었다.
(레븐쉬 외에 5명의 지휘관과 그들이 이끄는 소대? 잠깐, 왜 그 기간에 연구원까지 사망했지... 사망 원인이... "겨울 계획" 실험 사고?)
루시아는 "겨울 계획"의 그 종잡을 수 없는 네 글자를 보며 그들의 자료를 꼼꼼히 뒤졌다.
그들은 대부분 통합에 의해 쿠로노에서 온 연구원들이었지만 몇몇 소속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밀로 기재되어 있었다.
루시아는 계속 아래로 읽어 내려가다가 마지막 두 연구원만이 특별하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들의 사망 시간이 바로 얼마 전에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이 사망자 명단은 아직도 갱신되고 있는 건가? 이 연구원들은 왜 과거 희생된 군인들과 같은 파일에 기록했을까?)
하나의 생각이 루시아의 마음속에 떠오르면서, 그녀는 다시 한번 "겨울 계획"이라는 네 글자에 눈길을 돌렸다.
이 계획은 대체 뭘까? 앞의 두 글자만 놓고 보면 계획에 관한 어떤 내용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 자체가 내용을 감추기 위해 이런 이름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던 루시아는 다시 그 두 연구원의 명단을 들여다보니 그들의 소속이 사망할 때까지 "과학 이사회"에서 바뀌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이름은... 앤, 그리고 랜드.)
(만약 그들이 과학 이사회 사람이라면, 아시모프도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아시모프를 통해 정보를 수집해 볼까 생각했지만, 메시지에 적혔던 "언행 주의"라는 제시가 떠올랐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시선을 돌렸다. 단말기 스크린의 글자를 보며, 작은 로봇을 조립하고 있는 리가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전, 암호를 풀고 정보를 확인한 뒤, 리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발신자가 누군지 짐작이 가는 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메시지는 대체 누가 보낸 걸까?)
지금은 그 누구도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루시아는 다시 한번 초조함을 억누르고 눈앞의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11:55 a.m
현재 상황은?
지난 보고와 마찬가지로 전문가들이 아직도 [player name]을(를) 둘러싸고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몇 번 다녀왔지만 서류 측면을 포함한 모든 부분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어, 당장은 [player name]을(를) 데려오기 힘들 것 같습니다.
예전처럼 생명의 별 측에 연락해서, 그쪽이 진료하게 할 수는 없을까요?
그들은 그곳에 진작에 투입됐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player name]은(는) 다른 곳에서 "격리 간호"를 하겠지.
아시모프한테 맡기면 좋을 텐데.
하산은 문득 어떤 용건이 떠올랐는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고가 발생한 이후로 '그 프로젝트'가 지연되었다.
원래 최우선으로 수행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잇달아 일어난 중대 사고가 그 천재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럴 때 기술적인 문제가 아닌 것들까지 과학 이사회로 끌고 가면 사태만 더 악화될 게 분명했다.
그가 복잡한 기술 문제들을 어느 정도 손 보고, 부하에게 맡길 수 있기를 바라야겠구먼.
그들은?
아직... 그대로입니다.
더 이상 이럴 수 없습니다. 의장님.
하산이 대답하기도 전에 한 젊은 직원이 공손히 다가왔다.
[player name] 상황은 어떻게 됐나?
나름 정상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름 정상적이다"는 무슨 뜻이지?
전문가의 보고에 따르면 [player name]은(는) 때때로 활기가 없고 잠재의식이 비정상적으로 활발해진다고 합니다.
아침 식사를 할 때 컵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행동을 보였으며, 어젯밤에는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좀 이상합니다.
잠이 안 오거나 심심할 때 정상적인 사람도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 외에, 또 다른 점은 없나?
그쪽에서 방금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player name]의 군령 위반 행위는 현재 조사 중인 문제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연결된 구조체에도 이상이 생길 수 있으니...
직원은 황급히 작은 칩을 꺼내더니, 많이 지쳐 보이는 남성에게 건네주었다.
그래서 격리 치료를 며칠 더 하겠다?
그렇습니다.
칩을 건네받은 하산은 직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돌아서는 걸 지켜봤다.
의장님...
내 걱정이 결국 사실이 돼버렸군.
[player name]의 마인드 표식이 오염되어 일어난 증상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 [player name]의 증상은 아주 미미해. 지상 작전에 임할 때도 문제가 없었지. 과거에 오염되었던 지휘관들과 완전히 달랐어.
지금 확실한 건 [player name]이(가) 의식 오염을 저항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하지만 그래서 더 걱정되는군.
누가 [player name]의 임무 보고서를 유출했는지 밝혀내지 못했지만, 화서가 [player name]이(가) 승격자와 연결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판단한 건, 이미 그들에게 알려졌어.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처음으로 파오스의 창을 사용했을 때, 화서가 이를 이용해 역침입을 했고... 연이어서 이렇게 많은 사건을 일으켰죠.
하산은 생각에 잠긴 채, 칩을 움켜쥐고 광활한 우주를 바라보았다.
격리 간호는 핑계에 불과하고, [player name]이(가) 의식 오염에 저항하는 능력이 있으니, 그들에게는 절호의 기회겠지.
무대 뒤로 물러선 척하고 있는 "상어"들이 이 강렬한 피비린내를 맡으면 참을 수 있을까?
이번에는 또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까?
순간 침묵이 지휘 함교를 뒤덮었다.
세리카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과거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고, 보고서를 처리하면서 조금 알게 된 정도여서 어떤 조언도 할 수 없었다.
예전에 니콜라가 나한테 그런 말을 했었지. 끈끈한 유대감을 가진 소대는 자칫하면 피닉스 소대처럼 비극적인 결말을 맞을 수 있다고.
직설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그의 눈빛을 보니 그보다 진짜로 걱정되는 건, 그런 소대가 배신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었겠지.
인재를 아끼기 입장이든, 배신을 방지하기 차원이든, 어느 쪽이든 막론하고, 우린 [player name]을(를) 넘길 수 없어.
최소한 이 계획에서 [player name]의 안전이 확보되기 전까지는 그럴 수 없어.
그렇다면...
내가 간섭을 거부하는 건 아니야.
어떤 개인적인 이유가 있든, 그들은 여전히 뒤로 물러난 그 존재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어. 각자의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거지.
그들을 철저히 배제시키면, 우리도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어져.
이 난국을 타개하려면 더 교묘한 방법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시선을 피하고 작전을 실행할 의지가 있는 사람이 필요해.
적어도 [player name]이(가) 어떻게 하면 휴식을 취할 수 있을지, 방법을 생각해야 해.
이대로 가면 마인드 표식에 의한 오염이 없더라도, 피로 때문에 저항력을 잃고 말 거야. 이건 심문의 전형적인 수단이지.
혹시라도 그들이 계획한 일을 [player name]에게 맡겨서 진행하게 된다면, 사태는 우리 통제에서 벗어나게 돼.
다음 임무는 기타 소대에 맡겨야겠군요.
그래. 그동안 너무 고생했으니 [player name]이(가) 소대로 돌아오면 한동안 푹 쉬게 해야겠네.
다음 탐사 임무를 어느 소대에 맡길 생각이신가요?
인근에서 조사 중인 집행 부대가 주변을 탐사하고, 핵심 지대는... 차징 팔콘 소대에게 맡기는 게 좋겠네.
척후 소대는 정찰에 적합하지. 반즈는 필드 포인트 설치 임무를 경험한 적 있으니, 그 구역에 더 익숙할 거야.
그리고... [player name]이(가) 그때 "단독 행동"의 책임을 전부 짊어진 걸 보고, 그도 계속 [player name]의 후속 상황을 지켜보고 있지.
관심이 지나치면 혼란스러운 법.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이치잖아.
반즈를 계속 이곳에 둔다면, 그 집단은 또 하나의 감시 대상을 얻는 거나 마찬가지야. 지금 차징 팔콘 소대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어.
[player name]이(가) 필드 포인트 설치 중 얻은 정보는 매우 가치 있고, 반즈의 행동도 규정상 문제가 없어서 그들이 이걸로 져야 할 책임은 없을 겁니다.
반즈가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단독 행동을 했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네. 그때 둘이 함께 있었으니까.
공을 세워 속죄하더라도 법은 지켜야 하잖아. 처벌받지 않은 선례가 생기면 자신의 능력을 맹신하는 다른 사람들이 줄줄이 도박을 하기 시작하겠지.
이건 그냥 공식적인 설명일 뿐이죠?
사실 [player name]이(가) 처벌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네.
하지만 지금 이 중요한 시기에 [player name]에게 누명을 씌워, 자신의 통제 안에 가두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지.
물밑으로 많은 교섭을 시도했지만, [player name]의 "격리 치료" 조치는 막지 못했어.
하산은 몸을 돌려 사람들로 인해 광택이 나게된 바닥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아직 회의가 하나 남았는데 어디 가세요?
30분 연기해 주게. 확인해야 할 일들이 있어.
11:25 a.m
새 임무 배정 명령을 받기 30분 전, 크롬은 5분 일찍 텅 빈 밀폐된 실험 구역에 들어갔다.
그는 어두컴컴한 방 문을 열어 수많은 스크린에 앉아 있는 아시모프에게 인사를 건넸다.
딱 맞춰 왔네.
아시모프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간단하게 대답만 했다. 그의 옆 선실에는 새로운 기체가 잠들어 있었다.
이번 테스트 내용은 어떻게 되나요?
지난번 시뮬레이션 전투 테스트에서 얻은 데이터를 토대로 너의 새로운 기체를 재조정했어. 다시 한번 가상 연결을 시도해 봐.
네.
크롬은 이 테스트에 익숙해진 듯, 연결선을 자신의 목덜미에 꽂았다.
시작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