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번째 침식체 신호가 사라지고 주위는 잠시나마 조용해졌다.
상처투성이가 된 루시아는 침식체 잔해 무더기 사이에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가다듬으려 애쓰는 것 같았다.
지휘관님...
현재 주위 상황은... 어떻게 됐나요?
그렇군요.
루시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휘날리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지휘관님...
이번 작전에서 배급받은 퍼니싱 면역 혈청... 어느 정도 남았나요?
……
사실 방금 주사한 것이 마지막 혈청이었다.
……
저한테 숨기실 필요 없습니다.
지휘관님께서 첫 번째 혈청을 주사하실 때부터 계산하고 있었어요.
그럼 지금이 마지막 혈청의 효과가 지속된 지 42분째네요...
역시... 제가 계산했던 것과 일치하네요.
면역 혈청 전부 소진 시, 인간의 육체를 가진 지휘관님은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요.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기타 멤버들은 지원하러 오는 중이니... 지휘관님의 안전 철수를 확보하기 위해 현재 제가 나서서 시간을 끌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기체 통증 감각 신호가 계속 영향을 주고 있네요, 지휘관님.
지휘관님, 제가 계속해서 싸울 수 있게 잠시 통증 신호를 차단시켜주세요.
왜 망설이고 계시나요? 제 의식의 바다가... 영원히 인간 의식 모델로부터 벗어나게 될까 걱정하시는 건가요?
항상 그런 부분까지 신경 써주시네요.
괜찮아요. 지휘관님을 믿습니다. 의식 연결만 확보하면 지휘관님의 마인드 표식을 통해 저의 인간성이 유지되도록 도와줄 거예요.
독단적인 결정이지만... 지휘관님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반성은 그 후에 하는 것도 늦지 않아요. 허락해 주세요.
권한 통과. 신경 파라미터 재설정 중입니다...
의식의 바다 이탈 계수가 0.021 상승했습니다.
지... 지휘관님, 주변의 적들이 갑자기... 윽!
감각 시스템 초기화 중입니다.
구조체: 루시아, 로그아웃 성공.
해체... 재조합...
의식이 다시 로그인되기 전까지 소요되는 시간... 그녀가 유일하게 보호가 필요한 시간이다.
그러니 지금 해야 할 일은 단 한 가지...
인간!! 제거!!
총알은 침식체의 몸을 관통했지만 그들의 행진 속도는 전혀 늦춰지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침식체는 흉악한 칼날을 높게 추켜들었다.
칼날이 내려찍기 전 제압시킨다.
그리고 펀치를 날려 온몸에 구멍이 나버린 침식체의 상체를 붕괴시켰다.
침식체의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침식체가 허탕을 치고 미처 몸을 돌리기도 전에 발차기로 인해 머리 쪽 부품이 떨어졌고, 몸통은 행동력을 잃고 제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수많은 침식체들이 계속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삐!!!
침식체들이 휘청거리며 달려들었다.
지휘관님한테서... 떨어져...
삐!!!
삐...
초기화 성공. 의식: 루시아, 재연결 성공.
보고드립니다. 구조체 루시아가 다시 전장으로 복귀했습니다.
지휘관님, 수고하셨습니다. 지금부터 저에게 맡겨주세요.
삐!!!
통증 감각 신호를 차단한 루시아는 속박을 벗어난 듯 전장을 활보하기 시작했다.
마치 분쇄기처럼 주위의 침식체들을 무자비하게 파괴시켰다.
하지만 수많은 침식체로 형성된 포위망은 점점 축소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신호 접속 중...
지휘관님! 루시아!
저희 측은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어서 근처 엄폐물을 찾으세요!
경고: 고밀도 에너지원이 감지되었습니다.
지휘관님, 어서 엎드리세요!